8000만 원 주고 산 통행로, ‘지역권’ 명시 없으면 영구 사용 못 한다[판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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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만 원 주고 산 통행로, ‘지역권’ 명시 없으면 영구 사용 못 한다[판례방]

이데일리 2026-02-14 12:30: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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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희봉 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부동산 개발이나 공장 신축 현장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중요한 갈등 중 하나는 바로 진입로 정비 문제다. 맹지라 불리는 도로와 접하지 않은 땅에 건축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인근 토지 소유주로부터 통행로 사용 승낙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때 당사자들은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고 사용 승낙서를 주고받으며 모든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었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이러한 믿음은 안일하다. 토지 소유주에게 거액을 지급하고 수십 년간 도로로 사용해 왔더라도, 합의서에 기재된 문구 하나와 당사자들의 태도에 따라 영구적인 지역권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법리가 재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사진=나노바나나)


사건의 발단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 기장군의 한 맹지에 공장을 짓고자 했던 A 회사는 진입로 확보를 위해 인근 토지 공유자들에게 합의를 시도했다. 당시 A 회사는 토지 공유자 중 한 명인 D와 합의서를 작성하며 약 88평의 땅을 도로로 사용하는 대가로 8,000만 원이라는 작지 않은 금액을 지급했다. 또한 상대방의 편의를 위해 해당 토지에 근린생활시설 용도의 건축허가까지 대행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후 A 회사는 실제로 공장을 신축했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당 토지를 통행로로 점유하며 평온하게 사용해 왔다. 갈등은 원고인 A 회사가 해당 통행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피고들을 상대로 지역권설정등기 절차의 이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제1심과 원심은 원고에게 우호적이었다. 무엇보다 8,000만 원이라는 대금의 규모에 주목했다. 단순히 일시적인 사용료라고 하기에는 금액이 매우 크고, 합의서나 사용 승낙서에 사용 기간에 대한 제한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이는 당사자 사이에 영구적인 사용권을 설정하려는 묵시적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즉, 민법상 지역권이라는 용어를 직접 쓰지는 않았더라도 실질적인 권리 관계는 지역권 설정에 해당한다는 판단이었다. 특히 원심은 원고가 해당 토지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등기청구권의 소멸시효도 진행되지 않는다는 법리를 적용해 원고의 승소를 확정 짓는 듯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러한 하급심의 결론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의 근거로 삼은 핵심은 법률행위 해석의 원칙이었다. 법률행위의 해석은 당사자가 그 표시행위에 부여한 객관적 의미를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 당사자의 내심에 있는 주관적 의사를 추측하여 확장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대법원은 우선 합의서에 지역권이나 용익물권이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단순히 도로 사용에 동의한다는 문구와 대가 지급의 약정만으로는 물권적 권리인 지역권을 설정하기로 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특히 대법원이 주목한 문구는 도로 점용에 한한다는 표현이었다. 이는 합의의 성격이 토지에 대한 배타적이고 영구적인 권리 부여가 아니라, 단순히 통행을 위한 점용이라는 채권적 이용 권한에 한정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에 원고의 사후 태도 또한 불리하게 작용했다. 원고는 대금을 지급한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역권 설정을 요구한 적이 없었고, 소송을 처음 시작할 때조차 지역권이 아닌 임차권 설정을 구했다. 이는 원고 스스로도 자신들이 가진 권리가 물권적 성격의 지역권이라는 확신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적 증거가 되었다.

흔히 실무에서는 토지사용승낙서 한 장이면 도로를 쓰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승낙서는 원칙적으로 채권적 효력만을 가질 뿐이다. 만약 토지 소유자가 변경되거나 공유자 중 일부가 변심할 경우, 지역권 설정 등기 없이 한 사용 승낙은 새로운 소유자에게 대항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추후 등기도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다. 8,000만 원이라는 큰 비용을 치르고도 10년 뒤 등기조차 못한다면 토지사용에 있어 막대한 리스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맹지 탈출을 위해 인접 토지를 사용하고자 할 때는 계약 단계에서부터 권리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단순히 사용에 동의한다는 포괄적인 문구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해당 합의가 민법상 지역권 설정임을 명시하고 조속히 등기 절차를 밟아야 한다. 등기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점유만 한다면 소멸시효 문제뿐만 아니라 향후 토지 거래나 경매 과정에서 권리 상실 위험성도 발생한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격언처럼, 거액의 대가를 지급했다는 사실만으로 법이 모든 편의를 봐줄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희봉 변호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4회 변호사시험 △특허청 특허심판원 국선대리인 △(현)대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국선변호인 △(현)서울고등법원 국선대리인 △(현)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현)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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