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고려인마을 대표 "한국 국민으로 당당히 살게 해달라" 호소
인구 소멸 시대의 대안…고려인 정착 지원 장벽 해소 촉구
(광주=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스탈린은 우리를 장난감 알처럼 여기저기 던져놓았습니다. 죽거나 유랑하며 그저 버텨야 했던 세월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그 유랑을 끝내고 싶습니다. 광주 고려인마을은 단순한 정착지가 아니라 100년 넘게 헤맨 우리 동포들이 비로소 찾은 진짜 고향입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일명 '고려인마을'에서 만난 신조야(70) 사단법인 고려인마을 대표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간절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그는 2001년 한국 땅을 밟은 이후, 20년 넘게 국내 거주 고려인들의 권익 보호와 정착을 위해 헌신하며 고려인들의 '대모'로 불린다.
신 대표의 활동은 2002년 광주 평동공단에서 이천영 목사(현 고려인마을 이사장)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산업단지 근로자로 일하던 그는 임금 체불과 인권 침해를 직접 겪으며 어려움에 부닥친 동포들의 현실을 몸소 경험했다. 일요일마다 고려인 노동자들에게 무료 급식을 하던 이 목사와 인연을 맺으며 봉사의 길로 들어섰다.
"한민족이라는 핏줄이 저를 붙잡았던 것 같아요. 목사님은 다른 외국인들보다 우리 고려인들에게 특별히 더 마음을 쓰셨죠.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인 사역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신 대표는 2년간 이 목사 곁에서 봉사를 이어갔다. 한국어가 서툰 고려인들이 난방비를 감당하지 못해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월급을 털어 기름을 사주며 그들의 손발이 됐다.
초기 정착 과정은 눈물겨웠다. 광산구 안청동 시골집에서 고생하던 고려인들을 데리고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주택가로 옮기자"고 결심한 것이 마을 형성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는 원룸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좁은 방에 2층 침대 4개를 놓고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며 월세와 공과금을 나눠 냈죠. 그렇게 모여 시작한 것이 지금의 거대한 공동체가 된 겁니다."
이후 이 목사와 힘을 모아 보증금 300만원을 마련해 전국 최초의 고려인센터를 세웠다. 현재 광주 고려인마을은 일자리를 따라 자연 형성된 다른 지역 고려인 마을과 달리, 신 대표가 한 명 한 명 직접 불러 모으며 주도적으로 조성한 결과, 현재는 가족 단위 이주가 주를 이루는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공동체 기반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힘을 발휘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신 대표는 피란길에 오른 고려인 동포 약 900명의 항공권 마련을 돕고 광주 정착을 지원해 주목받았다.
"광주가 일자리가 풍족한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잘 압니다. 전쟁터에서 갈 곳 없는 동포들을 위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죠. 지난 11일 재외동포청장이 광주를 방문한 뒤 '국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정착 사례'라고 극찬하셨을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재 고려인마을에는 생활 밀착형 지원이 이뤄진다. 특히, 보육비 부담을 덜기 위해 자체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무료 법률 상담과 진료, 생필품과 장례 지원까지 촘촘한 복지 망을 갖췄다.
신 대표는 무엇보다 고려인 사회의 '정주 의지'를 강조했다. 한때는 돈을 벌어 돌아가려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광주를 삶의 터전이자 고향으로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한다.
"고려인들은 매우 성실합니다. 산업 현장에서 중요한 노동력을 담당해 왔고, 아이를 2~3명씩 낳으며 인구 위기 극복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 장벽은 여전히 높다. 가장 큰 어려움은 주거 문제다. "20년을 살아도 여전히 월세살이입니다. 공공임대주택은 한국 국적자 중심이라 접근이 어렵습니다. 매달 큰돈이 월세로 나가니 자산을 모으기 힘들고 빈곤이 대물림됩니다."
그의 시선은 이제 차세대를 향한다. 마을 학교와 어린이집을 채운 고려인 3·4세들이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랑을 강요받았습니다.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 덕분에 입국과 정착의 길이 열렸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신 대표는 마지막으로 정부와 사회에 호소했다.
"우리는 남의 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이곳에 뿌리내리고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통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행정 서비스에서도 차별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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