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던 10대 시절, 공립 도서관에서 19세 이상은 대여할 수 없다는 책이 있길래 대여는 하지 못하고 서가에 서서 읽었던 책이 있다. 사드 후작의 저서 <소돔 120일>이다. 성도착증과 성착취 그리고 살인을 묘사한 내용으로 10대의 나는 충격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엡스타인 문건에 대한 뉴스를 볼 때마다 <소돔 120일>의 내용이 겹쳐 보였다. 물론 소돔 120일보다 엡스타인 문건에서 알려진 내용이 더 방대하고 더 많은 이들이 연루되어 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극적인 내용이 많아서 처음엔 또 하나의 음모론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 끔찍한 내용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수많은 미성년자와 여성들이 성착취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엡스타인 문건에 오른 유명 인사들
제프리 엡스타인은 수십 년간 미성년자들과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2019년에 수감돼 재판받았다. 이에 대한 기록을 '엡스타인 문건'이라고 부른다.
엡스타인은 수감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의 성착취 범죄는 현재 공개된 내용만으로도 무려 350만 페이지, 18만 장의 이미지와 2000여개 이상의 동영상에 남겨져 있다. 그야말로 방대한 성착취가 실재했다는 증거다.
2020년에 나온 '제프리 엡스타인 : 괴물이 된 억만장자'라는 다큐에서도 해당 내용을 일부 다룬적이 있다. 이 다큐는 성착취에 대한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구성돼 있다.
문건에는 정재계는 물론 학계, 예술계까지 수 많은 유명 인사가 언급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 앤드루 왕자,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빈살만은 물론 노엄 촘스키와 스티븐 호킹까지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다. 문건은 지금도 계속 공개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부인하고 있고 빌 클린턴 역시 청문회 출석 요구를 거절하고 있다.
버닝썬, 김학의 성폭력 사건.... 엡스타인 뉴스와 함께 떠오르는 것들
최근 공개된 엡스타인 문건에는 '유명환'이라는 한국인의 이름도 있다.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자 세종대학교 대양학원 이사였던 '유명환'으로 추측된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엡스타인과 구체적인 연이 있는지 알려진 바 없으나 우리 사회는 이미 권력자들의 성 착취가 만연한 곳이기에 엡스타인 문건에 한국인의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김학의 성폭력 사건은 당시 현직 검사를 비롯하여 사회권력층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성폭력을 저지른 사건이다. 2013년 이 사건이 알려졌으나 결론적으로 가해자로 지목된 공직자는 그 누구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버닝썬은 어떤가. 클럽 내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을 저지르고 각 분야의 고위직들에게 조직적 성접대를 한 정황이 드러났으나 처벌받은 것은 클럽의 홍보 담당자였던 남성 연예인과 소수의 가해자들 뿐이다. 버닝썬의 성착취 내용은 2024년 BBC에서 다큐로 제작하기도 했다. 해당 다큐에서는 버닝썬에서 일어난 성폭력 가해 행위에 고위직 공무원, 경찰들의 연루를 확인했다는 성범죄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이 있다.
성착취 범죄에서 사회적 권력이 있는 이들은 쉽게 제외된다. 처벌받지 않거나 아예 고소, 고발,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엡스타인 문건, 버닝썬 사건, 김학의 사건 등이 성착취를 이용한 기득권 남성들의 권력이 서로 연계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성범죄를 함께 저지르고 이를 매개로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성착취를 함께 즐기며 서로의 지위와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착취는 권력 확장의 수단이었다. 엡스타인, 김학의, 버닝썬의 주요 인물들까지 분명 그 점을 이용했을 것이다. 성착취의 내용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이유도 그 연루를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성착취를 통해 거대한 권력을 형성하고 그 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인권의식이 깨어있는 이들의 연대가 성착취 범죄를 종식할 것이다
페미니스트이자 인권 활동가로서 무력감을 느껴질 때가 많다. 어째서 세계에 온갖 성착취 범죄가 끊이질 않는 것일까. 다시 사드 후작의 <소돔 120일>을 읽는다면 처음 본 10대 시절처럼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이미 그보다 더 한 현실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 어두운 면을 어떻게 보고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예전에는 성착취 범죄를 뉴스에 접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지만 이제는 어지간한 성폭력 사건 소식을 접하고도 이전만큼 놀라진 않는다. 성폭력 피해 내용의 끔찍함에 무뎌져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다. 이는 많은 이들이 끝없이 반복되는 성착취 사건 앞에서 느끼는 공통의 감각일 것 같다. 이 무력감과 난감함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까.
무엇보다 인권의 진보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다. 여성과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들도 성인 남성과 동등한 인권이 있다. 수 많은 사람이 바로 그 당연한 권리를 위해 자신이 입은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투쟁하고 있다. 엡스타인 성착취 사건, 버닝썬, 김학의 사건등을 고발하는 용감한 증언자들이 그들이다. 모든 성범죄는 권력과 위계의 문제이므로 성범죄를 고발하는 이들은 권력과 위계에 맞서는 이들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의 곁에 서야 한다.
자신이 겪은 성폭력에 대해 말하는 성범죄 피해자, 그들의 목소리를 대상화하거나 타자화하지 않고 공정한 언어로 미디어를 통해 알리는 언론인, 피해자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 그 모든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민들까지. 우리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연루될 것이다. 이 연루됨을 인지하는 연대가 우리 세계의 권력형 성착취, 성범죄를 뿌리 뽑을 것이다. 최근 권력형 성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았던 안희정 씨가 공식 정치행사에 얼굴을 드러낸 것에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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