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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현장에 들어서는 장혜진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공간의 공기가 바뀌는 듯했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밝고 환한 에너지가 주변을 채웠다. 작품 속에서 그가 보여준 인물들이 어쩌면 ‘배우 장혜진’이 아닌 ‘사람 장혜진’에게 기대어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언론시사회 당시 자기 아들이 '최우식'을 닮았다고 언급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고 한 사람마다 만으로 10살 된 자신의 아들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로 최우식과 장혜진은 영화 ‘기생충’, ‘세계의 주인’에 이어 ‘넘버원’에서도 모자 관계로 만났다. 같은 ‘엄마’였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존재했다.
영화 ‘넘버원’에서 장혜진이 연기한 은실은 그동안 그가 보여준 엄마 캐릭터와 결이 다르다. 남편과 첫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상처를 지닌 인물이지만, 은실은 둘째 아들 하민(최우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 밖 어딘가에서 모든 눈물을 쏟아낸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씩씩하게 삶을 이어가는 인물이다. 하민은 어느 날 엄마가 해준 밥을 먹을 때마다 눈앞에 숫자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숫자가 0이 되면 엄마가 죽는다는 설정은 한 줄 설명만으로도 눈물을 자극한다. 그러나 장혜진은 울지 않는다. 대신 “제가 다치면 영화가 잘된다”라는 독한 농담으로 웃음을 던진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큰 감정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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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명절에 '넘버원'의 개봉을 앞둔 마음이 어떨까.
"힘든 작품이 많았으니, '넘버원'처럼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영화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도 지방에서 왔지만, 지방에서 온 사람이 가끔 서울 시멘트 냄새에 지칠 때 가장 그리운 게 집이고 고향이다. 그 상징이 '엄마 집밥' 같다. 그래서 영화에 따뜻함이 더해진 것 같다. '엄마'라는 치트 키를 썼지만, 역시 치트 키에는 이유가 다 있더라. 그 누구도 엄마 없이 태어날 수는 없지 않나. 엄마와 관계가 좋든, 나쁘든,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마음이 큰 것 같다. 그래서 '넘버원'은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라서 명절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Q. 김태용 감독에게 '넘버원' 시나리오를 받고 어떤 점에 출연을 결심했나.
"제가 주로 엄마 역할을 많이 하니, 대본이 주로 엄마다. 그런데 '은실'이를 봤을 때, 너무 '기특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일찍 죽고, 큰아들도 사고로 죽고, 눈물이 더 이상 나지 않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눈물을 머금고 둘째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살면서 힘든 일을 겪을 텐데, 유머를 잃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모습이 있다. 아들이 집밥을 먹지 않겠다고 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자기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우리 엄마 같은 모습이다. 하민이 눈에 보이는 숫자는 판타지이지만, 사실 모두가 눈앞의 숫자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고 있지 않나. 숫자가 100이 남았는지, 1이 남았는지 모르는 거다. '내 눈에 숫자가 보인다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런 따뜻하고, 힘이 되는 이야기, 누군가 기댈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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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은실은 남편과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다. 어찌 보면 살아가는 것조차 너무나 힘든 상황 아닌가. 실제로 엄마와 아내로 살아가기도 하기에, 과몰입하게 되는 상황들이 있었을 것 같다.
"제 MBTI 중에 F(감성형)가 있다. 제 마음은 항상 과몰입이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늘 같이 화내고, 웃고, 울고 한다. '넘버원' 뿐만아니라, 모든 작품에 항상 과몰입 상태다. 아픈 연기를 하면, 며칠 전부터 제 몸이 아프다. 메소드 연기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계속 보고, 계속 생각하고 하다 보면, 아픈 장면을 내일모레 촬영한다면, 며칠 전부터 어딘가 아프기 시작한다. 진짜 몸이 아파서 아픈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넘버원' 속 은실은 힘들어도, 유쾌하게 뚜벅뚜벅 살아가는 인물이기에 힘든 게 없었다. 단지 하나, 의자에 풀썩 주저앉는 장면을 촬영할 때, '뻑' 소리가 날 정도로 제가 잘못 세게 앉았다. 다치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이 영화 잘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제가 다치면 영화가 잘된다. '기생충' 때도, '사랑의 불시착' 때도 크고 작은 다침이 있었다. (웃음)"
Q. '넘버원'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장면이 그 털썩 주저앉았던 장면이 아닐까 싶다. 하민이 앞에서 은실이 그렇게 앉는 모습 속에, 표정 속에, 눈빛 속에, 모든 말이 다 담겨있었다.
"최대한 눈물을 안 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울면 안되니까, 미리 울었다. 미리 울어서 현장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너무 힘들면, 눈물도 안 나올 때가 있지 않나. 그런 상태를 만들고 싶어서, 미리 슬픈 걸 보며 눈물을 메마르게 했다. '넘버원'에서 은실이가 우는 장면이 별로 없다. 은실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울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무릎 꿇는 장면에서도 눈물을 한 방울도 안 흘리고 싶었다. 쥐어짜면 '억억' 하면서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상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울면 자칫 눈물을 강요하는 신파로 흘러갈지 우려했다. 감정은 관객에게 먼저 가닿아야 하는데, 그 전에 제가 그 감정을 설명하거나 보여줘 버릴까 봐 담담하게 연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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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우식과 영화 '기생충'에 이어 모자 호흡을 맞췄다.
"최우식이 먼저 캐스팅됐고, 뒤에 연락받았다. 사실 '기생충'이라는 작품으로 크게 각인돼 있기에 다시 한번 모자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최)우식이가 너무 잘 챙겨줬다. 제가 '넘버원'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 소속사가 없어서 택시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데, 그때 (최)우식이가 저를 집에 데려다주고, '어머니'라고 부르며 잘 챙겨줬다. 제가 카메라에 대해 잘 모르면, (최)우식이는 '저도 잘 모른다'라면서 팁을 많이 알려줬다. 제 생일에도 (최)우식이가 식당에 가서 수육 같은 고기를 사 와서 생일상을 차려줬다. 저는 그만큼 못 해준 것 같다. 오히려 제가 받기만 했다. '기생충'때도 고마운 배려를 많이 받아서, '이번엔 잘 챙겨줘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많이 받기만 했다. 제가 아는 (최)우식이는 상당히 예의 바르다. 그리고 헐렁헐렁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자기 할 일을 야무지게 해낸다. 연기도 쉽게 하지 않고, 흐름을 계산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해낸다. 이번에도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서 '언제쯤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Q. 최우식과 닮은 아들이 있고, 첫째 딸도 있고, 두 아이의 엄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자신은 어떤 엄마인가.
"딸은 23살, 아들은 11살이다. 둘이 띠동갑이다. 아들은 정말 (최)우식이랑 많이 닮았다. 작은 얼굴과 허우적거리며 독특하게 걷는 걸음걸이가 정말 많이 닮았다. '기생충' 때도 둘이 닮았다고 생각해서 제 아들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사실 제가 독립영화 작업을 하다 보니, 제 아들은 자연스럽게 출연 경험이 있다. 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 영화 '우리들'을 찍었고, '세계의 주인'에서도 태권 소년으로 등장한다. 딸은 저랑 소울메이트다. 제가 천방지축 말괄량이 재질이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딸을 낳고 키우면서 감정이 많이 정리되고 차분해졌다. 결혼하고, 딸을 낳으면서 많은 것들이 안정됐다. 사람이 갑자기 수십억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안정감을 주더라. 쉽게 손을 놓지 않게 되는 삶의 끈을 쥔 존재가 있어서. 우리 딸은 저와 달리 성향이 차분하다. 제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한다. 성격이 다른 엄마를 귀여워해 주는 것 같다. 요즘에는 메이크업을 고쳐주기도 하고, 쇼핑도 함께 다니고, 같이 술도 마신다. 그냥 재미있다. 제 딸은 제 소울메이트고,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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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과거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기를 접었던 시간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시간을 지나 지금의 다양한 작품 속에서 임하는 '배우 장혜진'이라는 자아를 보면 남다른 기분이 들 것 같다.
"저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어딘가 특이하고 개성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연기에 힘을 주게 되더라. 그러니 더 매력이 떨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왜 계속 캐스팅이 안 될까?' 탓만 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꾸만 작아지다가 저 자신이 소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연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모든 걸 정리하고 고향 부산으로 갔고, 가장 접근하기 쉬운 마트 일을 시작했다. 마트에서 화장품을 팔다가, 열심히 하다 보니 마트를 맡고, 백화점으로 가고, 자꾸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더라. 그런데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야간학교 봉사활동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학 선생님인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연애하고, 결혼하며, 남편이 서울로 취직해서 자연스럽게 서울에 살게 됐다. 그때만 해도 다시 배우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밀양' 오디션 소식을 들었다. 제가 사투리를 쓰니, 오디션을 보라고 하시더라. 이창동 감독님께서 제 교수님이셨으니,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싶어서 갔다. 그때 아이가 세 살이었다. 그렇게 갔다가 캐스팅이 됐다. 현장에 가니 너무 신났다. 남편에게 한 번만 한다고 했는데 '미안한데 나 계속 해야 할 것 같다, 너무 신난다'라고 했다. 남편이 '내 월급 다 써도 되니, 오디션 갈 때 좋은 옷 사 입고 가라'라고 하더라. 친구들이 모은 돈을 주며 '좋은 신발 사 신고 가라'라고 하더라. 잘 될 줄 알았는데, 약 10년 정도 또 단역으로 있었다. 지쳐갔다. 그러면서도 재미있었다. 이제는 남편 차도 바꿔줬다. 좋은 옷도 사줬는데, 못 입고 걸어만 놓더라. 남편은 지금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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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장 크게 느끼는 연기의 재미는 뭘까.
"현장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다. 스태프들이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왔다 갔다 할 때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여름에는 옷에 땀이 번져서 소금처럼 하얗게 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모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답이 하나다. 좋으니까 하는 거다. 그게 너무 아름답다. 지금 저에게도 일이 꾸준히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매 작품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라는 직업은 다음 작품이 없으면 안 되는, 계속 선택 받아야 하는 직업이기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고맙고, 감사하다."
현장에서 마주치는 땀방울의 아름다움을 아는 장혜진은 진심으로 작품을 사랑하는 배우다. 혼란스러웠던 시간을 묵묵히 함께 견뎌준 남편의 고마움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그는 사랑스러운 아내이고, 아들과 딸의 이야기만으로도 얼굴에 한발 먼저 미소가 번지는 유쾌한 엄마다. 그 여러 얼굴이 모여 오늘의 장혜진을 만든다. 그리고 그 단단한 삶의 결이, 매 작품마다 인물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일까. 그의 이름이 먼저 보이는 작품이라면, 우리는 이미 한발 앞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한다.
- 조명현 기자 midol.i.e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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