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이 한창인 지금 스키·스노보드 종목에서 3번째 메달 사냥에 성공했다. 몇 십 년 전만해도 국내에서 비인기 종목으로 손꼽혔던 스노보드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노리는 종목이 됐다. 한때 서브컬처로 여겨지던 종목들이 노래, 영화, 드라마 같은 대중 콘텐츠를 계기로 대중의 관심을 얻고 저변을 넓힌 뒤 국제무대에서 성과까지 내는 사례가 국내외에서 잇따르고 있다. 문화가 만든 '관심'이 선수층 확대와 투자 증가로 이어지고 결국 메달이라는 결실로 돌아오는 구조가 굳어지는 모습이다
최가온은 13일(한국 시각)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열린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결선에서 90.25점을 획득해 우승했다. 최가온은 이번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첫 금메달과 함께 한국 스키·스노보드 1호 금메달 주인공이 됐다. 최가온은 "첫 올림픽에 첫 메달이 금메달이어서 너무 행복하고 믿기지 않는다"며 "다치고 나서 떨리는 마음으로 3차 시기를 탔는데 잘 해내서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획득한 4개의 메달 중 3개가 스키·스노보드 종목에서 따낸 것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스노보드는 20여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생소한 스포츠였다. 전환점은 1995년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4집 수록곡 'Free Style(프리 스타일)' 뮤직비디오가 대중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며 스노보드 문화를 알렸다. 당시만 해도 설원 위에서 보드를 타는 모습은 일부 마니아층의 문화에 가까웠지만 음악과 영상이 결합된 대중 콘텐츠를 통해 'X세대'의 자유와 도전의 상징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이후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며 스키장 내 스노보드 인구가 급격히 늘었고 자연스럽게 1세대 동호인들이 부모가 돼 자녀에게 종목을 권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코르티나 올림픽에 참여한 10대 선수 중 가운데 상당수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통해 처음 보드를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중문화가 촉발한 유행이 세대를 건너 선수층 확대로 이어졌고 그 축적의 결과가 올림픽 금메달로 나타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스노보드뿐만 아니라 비인기 종목이 콘텐츠 인기를 발판 삼아 국제무대 성과로 이어진 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한때 침체기를 겪었던 배구를 비롯해 축구, 야구 등 종목이 애니메이션을 계기로 청소년층의 관심을 다시 끌어올리며 경쟁력을 회복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영국에서는 트랙 사이클이 다큐멘터리 방영, TV에서 온라인 중개 등으로 인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일본 배구는 2000년대 후반까지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2014년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하이큐!!'는 히나타 쇼요와 카게야마 토비오를 중심으로 고교 배구부의 성장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10대 시청자층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작품은 배구의 속도감과 팀워크, 포지션별 역할을 세밀하게 묘사해 10대 일본인 선수들이게 "직접 해보고 싶은 스포츠"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싱가포르의 마케팅·스포츠 트렌드를 다루는 매체 가이즈파이는 '하이큐!!' 방영 이후 일본 내 중·고교 배구부 부원 수가 2012년 약 3만7000명에서 2016년 약 4만6000명으로 증가했다고 전했다. 방영 시기와 부원 수 증가 흐름이 맞물린다는 점에서 작품이 청소년층 유입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저변 확대는 대표팀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선수층이 두터워지면서 재능 있는 유망주 발굴이 활발해졌고 이는 성인 대표팀 전력 강화로 연결됐다. 일본 남자 배구 대표팀 '류진 닛폰'은 작은 신장을 극복하는 빠른 공격 전개와 조직력을 앞세워 2024년 FIVB Volleyball Men's Nations League 준우승을 차지했고 세계랭킹 2위까지 오르며 최정상급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간 일본에서 축구는 야구에 밀려 비주류 종목에 가까웠다. 하지만 1981년 축구 천재 소년 오오조라 츠바사의 성장기를 그린 '캡틴 츠바사'가 연재를 시작한 이후 일본 전역에 축구 열풍을 일으켰다. 작품의 인기는 단순한 흥행을 넘어 실제 참여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당시 유소년 축구 등록 인원이 크게 늘었고 학교 운동장에는 '츠바사'를 따라 하는 어린이들이 넘쳐났다. 일본 축구협회 관계자들 역시 "캡틴 츠바사 세대가 일본 축구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평가해왔다.
특히 나카타 히데토시, 혼다 케이스케, 카가와 신지 등 일본 대표팀의 주축이 된 선수들이 "어린 시절 캡틴 츠바사를 보고 축구를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후 일본은 1993년 J리그 출범을 거쳐 1998년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회에서 사상 첫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월드컵 본선 단골 국가로 자리매김하며 아시아 축구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AFC에서 총 4회 우승(1992, 2000, 2004, 2011)하며 아시안컵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기록한 국가로 성장했다.
영국 트랙 사이클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중적 인지도 면에서는 축구나 럭비에 비해 존재감이 크지 않은 종목이었다. 그러나 BBC의 투르 드 프랑스 중계 확대와 올림픽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 크리스 호이와 브래들리 위긴스 등 스타 선수에 대한 집중 조명이 이어지면서 사이클은 '첨단 과학과 파워가 결합된 세련된 스포츠'라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이러한 콘텐츠로 인해 사이클에 관심이 증가하면서 실제 참여 확대로 이어졌다. 영국 사이클링(British Cycling)은 2005년 이후 회원 수가 꾸준히 증가했다며 2012년 런던 올림픽 직후 수천 명의 신규 회원이 가입했다고 밝혔다. 정부 산하 스포츠잉글랜드(Sport England) 역시 2010년대 초반 조사에서 주 1회 이상 자전거를 타는 인구가 증가 추세를 보였다고 발표했다.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 참가자와 지역 클럽 등록 인원도 같은 기간 크게 늘어나며 엘리트 선수들이 강화됐다는 평가다.
이러한 성과는 곧 국제대회 성과로 이어졌다. 영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트랙 사이클 금메달 7개를 휩쓸며 세계 최강으로 부상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트랙 종목 금메달 8개를 차지하며 지배력을 재확인했다. 정책적 투자와 미디어 노출, 스타 선수 효과가 맞물리며 비주류 종목이 국가 전략 종목으로 도약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콘텐츠가 스포츠 생태계 전반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특정 분야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대중의 동경을 자극하는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며 "서태지의 뮤직비디오나 일본의 스포츠 애니메이션 사례처럼 콘텐츠가 만들어낸 문화적 트렌드가 한 세대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을 때 해당 종목의 참여 인구와 인적 인프라가 비약적으로 확충되는 전환점이 마련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처럼 형성된 저변은 단기간에 성과로 이어지기보다 5년, 10년 이상 축적되면서 국가대표 경쟁력 강화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며 "문화와 스포츠 정책, 산업 구조가 맞물릴 때 국제대회 성과라는 결실로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Copyright ⓒ 르데스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