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현실 속에서 1930년대 대중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고단한 삶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고 동시에 말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흘려보내는 창구였다.
이 시기 음악의 중심에는 트로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트롯 계열의 유행가와 세태를 풍자한 '만요(漫謠)'가 공존하고 있었다. 남인수의 애절한 창법과 이난영의 비음 그리고 <오빠는 풍각쟁이> <세상은 요지경> 과 같은 만요는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품고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세상은> 오빠는>
1930년대는 기술적으로도 중요한 전환기였다. 라디오 방송의 보급과 함께 유성기판(SP, Shellac Record)이 대중화되면서 '음악을 사서 듣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SP 음반은 분당 78회전으로 재생되는 쉘락 재질의 음반으로 한 면에 약 3분가량의 음악만 담을 수 있었다.
이 짧은 러닝타임은 자연스럽게 한국 대중음악의 형식을 규정했다. 간결한 도입, 반복적인 후렴, 3분 내외의 구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중가요의 기본 틀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난 규정하고 싶다.
이와 동시에 1927년 개국한 조선방송협회(JODK)의 라디오 방송은 음악을 특정 지역이 아닌 '동시대 조선 전체'가 공유하는 경험으로 만들었다. 음반 산업과 방송 매체의 결합은 대중음악을 산업으로 성장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
우리 손으로 일군 꿈, 오케이(OK)레코드의 등장
1932년 이철에 의해 설립된 오케이레코드(OK Record)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이전까지 음반 산업은 일본 자본과 기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케이레코드는 조선인 기획자가 중심이 된 최초의 본격 레코드사였다.
이 회사는 남인수 이난영 장세정 등 당대 최고의 스타를 발굴하며 조선 대중음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단순히 음반을 찍는 회사가 아니라 스타 시스템을 구축한 기획사에 가까웠다.
이 시기부터 '가수'는 단순한 노래꾼이 아니라 음반·공연·홍보가 결합된 근대적 연예 산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생존과 경제적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연, 마케팅, 악단 시스템 등 오케이레코드는 단순한 녹음 제작사를 넘어섰다.
이들은 전속 악단을 운영하며 음반 제작의 완성도를 높였고 '오케이 그랜드 쇼단'을 조직해 전국 순회공연을 펼쳤다. 이는 오늘날 K팝의 월드 투어와 유사한 콘서트 비즈니스 모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음반 판매와 공연 수익을 동시에 확보하는 구조가 이미 1930년대에 형성된 것이다. 현재 뮤직 비즈니스의 가장 큰 두 분야의 영역인 음반과 콘서트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마케팅 전략 또한 치밀했다. 신문 광고, 가사지 배포, 스타 이미지 구축 등 체계적인 홍보 시스템을 갖추었다. 대중의 감성을 읽고 시장을 기획하는 감각은 이미 이 시기부터 존재했다.
제국축음기와의 전략적 제휴와 마케팅의 확장
흥미로운 지점은 오케이레코드가 일본의 제국축음기(데이치쿠)와 맺은 제휴 관계다. 이를 단순히 식민지 종속 구조로만 해석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철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활용해 조선 음반의 품질을 끌어올렸고 동시에 조선 가수를 일본 시장에 진출시키는 교두보로 삼았다.
이는 현대 K팝이 글로벌 플랫폼 및 현지 레이블과 협력해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억압의 시대였지만 그 안에서도 산업적 전략은 존재했다. 생존은 때로 타협이 아니라 계산이었고 계산은 곧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상황은 급변한다. 일제는 조선 사회 전반에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했고 음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국민가요'라는 이름으로 친일적 색채를 띤 노래들이 제작되었고 검열은 더욱 심해졌다.
이 시기 일부 가수와 작곡가는 시대적 압박 속에서 친일 가요를 부르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는 복합적 유산이다. 그러나 동시에 표면적 가사와 달리 은유와 상징을 통해 민족 정서를 유지하려는 시도 또한 존재했다. 음악은 억압 속에서 형태를 바꾸어 갔지만 우리 고유의 대중음악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울어라 은방울> 기술적 자립의 상징 울어라>
1940년대 후반 전쟁과 물자 부족 속에서도 한국 대중음악사는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다.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 은 기획, 작곡, 가창은 물론 녹음과 프레스까지 국내 기술과 설비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울어라>
이는 단순한 히트곡이 아니라 제작 전 과정의 국산화라는 산업적 성취를 의미한다. 외부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음악 콘텐츠'를 완성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 가 한국 대중음악의 근대적 출발점이었다면 1940년대 후반의 이 성취는 산업적 자립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사의>
1930~1940년대는 식민지의 비극이 드리운 눈물의 시대였지만 역설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근대적 골격이 완성된 역동적인 시기였다. 유성기판(SP)의 대중화는 음악을 소유하는 산업의 시대를 열었고 78회전 음반이 지닌 3분 내외의 시간적 제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중가요의 표준 형식을 규정했다.
이 척박한 사회에서 오케이레코드는 자본의 한계를 전략적 제휴로 돌파하고 스타 시스템과 전국 순회공연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며 훗날 세계를 무대로 삼을 K팝의 산업적 설계도를 그려 나갔다.
시대의 억압은 노래를 검열하고 때로 굴절시켰으나 우리 손으로 일궈낸 기술적 자립은 조선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아내려는 고군분투로 이어졌다. 결국 이 시대의 노래는 단순히 슬픔을 달래는 도구를 넘어 거대한 산업적 조류 속에서 자생력을 키우며 다음 세대의 거대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해방 이후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유입된 서구 음악이 어떻게 한국적 정서와 결합해 또 다른 물줄기를 만들어냈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그때부터 한국 대중음악은 다시 한번 거대하게 요동치며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만요(漫謠)=1930년대 유행했던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대중가요다. 일상생활의 고단함이나 세태를 재치 있는 가사와 경쾌한 가락에 담아내어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경제신문 김성만 음악프로듀서 · 공연기획자 musicman2@hanmail.net
김성만 음악프로듀서·공연기획자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Bassiano Accademia delle Arti에서 예술 매니지먼트 최고 과정을 수료했다. 삼성에버랜드 엔터테인먼트팀 음악감독과 전략기획팀을 거치며 대형 공연·전시·테마 콘텐츠의 음악 및 기획을 담당했다. 국내외 대형 문화행사를 비롯해 엑스포, 국가 기념행사, 테마파크, 영상·게임·드라마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숭실대학교, 수원여자대학교 대학원, 경민대학교 등에서 공연기획과 음악콘텐츠 프로듀싱을 강의했으며, 현재는 서울재즈아카데미(SJA)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문화예술콘텐츠 기획·제작사 (주)바콘웨이브 대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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