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가상자산 정책의 무게추가 이동하고 있다. 빗썸의 초대형 비트코인 오지급 사고 이후 더불어민주당과 금융당국이 추진해 온 디지털자산기본법 초점이 ‘산업 육성’에서 ‘내부통제 및 지배구조 규율 강화’로 옮겨가는 양상이다. 그동안 민주당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TF)가 마련한 통합안을 중심으로 입법이 진행됐지만, 최근 정책위원회가 전면에 나서며 논의 구조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입법 주도권과 규제 방향이 동시에 재조정 국면에 들어섰다는 분석이다.
이번 사고는 이벤트 보상 지급 과정에서 발생한 전산 입력 오류에서 비롯됐다. 지난 6일 빗썸 마케팅 담당 직원이 ‘랜덤박스’ 이벤트 당첨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단위를 ‘원’이 아닌 비트코인(BTC)으로 선택, 당첨자 계정에 실제 보유 규모를 크게 웃도는 물량이 반영됐다. 이후 일부 물량이 시장에 유입되며 가격 변동성이 확대됐고, 추가 하락 시 강제청산과 패닉셀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적 리스크가 함께 드러났다.
사고 규모 역시 이례적이었다. 오지급된 비트코인은 약 62만개로, 당시 시세 기준으로는 약 61조원에 달했다. 이는 전 세계 비트코인 총발행량의 약 3%에 해당하는 규모다. 반면 빗썸이 실제 보유한 비트코인은 약 4만3000개에 그쳐, 장부상 잔액이 실물 보유량을 크게 상회하는 이른바 ‘유령 코인’이 대량 반영된 구조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사고는 가상자산 거래소의 장부거래 방식과 내부 통제 체계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매매가 이뤄질 때마다 실물 자산을 즉시 이동시키는 구조가 아닌 장부상 잔액을 먼저 변경하는 방식에서, 단일 입력 오류가 대규모 잔액 반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은행이나 증권사처럼 실보유 자산과 장부 잔액을 상시 대조하거나 자산 유출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다중 검증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법적 공백 역시 이번 사태에서 함께 부각됐다. 오지급된 비트코인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민사상 부당이득 반환 청구는 가능하지만, 형사 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대법원은 가상자산을 법정화폐와 동일한 ‘재물’로 보기 어렵다며 횡령·배임 성립을 부정한 판례를 남긴 바 있다. 시장 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현행 법체계만으로는 책임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일부 오지급 물량이 시장에 매도되며 가격이 급락했고, 추가 하락 시 강제청산과 패닉셀로 이어질 경우 소비자 피해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현재 1100만명 이상이 가상자산 거래소를 이용하는 상황에서, 향후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 도입까지 고려하면 거래 인프라 전반에 대한 제도 정비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사고 직후 한정애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를 “가상자산 신뢰 기반을 흔드는 문제”로 규정하며 이달 중 디지털자산기본법 발의를 예고했다. 그는 거래소 장부와 실제 보유 자산 간 검증 체계 부재, 다중 확인 절차 미비, 인적 오류 통제 장치 부족 등을 짚으며 내부통제 기준 의무화와 외부 기관의 주기적 보유 자산 점검, 전산 사고 발생 시 무과실 책임 규정 도입 필요성을 언급했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은 가상자산 시장 전반을 포괄적으로 규율하기 위한 입법으로 추진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특정금융정보법을 통해 자금세탁 방지 중심의 제한적 관리만 이뤄져 왔던 만큼, 별도의 기본법 체계 안에서 거래소 운영과 자산 발행, 투자자 보호 원칙 등을 정비하겠다는 구상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조와 거래소 지배구조, 이용자 보호 기준 등을 하나의 법 틀 안에서 설계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금융위원회도 금융정보분석원(FIU)과 금융감독원,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닥사)와 함께 긴급 대응반을 꾸리고 전 거래소를 대상으로 가상자산 보유·운영 현황과 내부통제 체계 점검에 착수했다. 정부안에는 은행이 50%+1주를 보유하는 스테이블코인 컨소시엄 구조와 거래소 대주주 지분을 15~20%로 제한하는 방안이 핵심 쟁점으로 담겼다. 금융당국은 가상자산 거래소를 공공 인프라적 성격의 기반시설로 보고 금융회사에 준하는 규율 체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 해당 내용은 민주당 TF가 마련한 통합안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사안으로 알려졌다.
애초 TF는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를 더욱 폭넓게 허용하는 방향에서 논의를 진행, 거래소 대주주 지분 제한 역시 통합안에는 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책위원회가 금융위원회 안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입법 논의의 중심축이 TF에서 정책위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는 의견도 나온다.
TF 소속 의원들도 정부안과 업계 입장 사이에서 절충안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최종 조율은 정책위 주도로 이뤄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분위기다. 당초 핀테크·플랫폼 기업 중심의 발행 구조를 열어두자는 논의가 이어졌지만, 사고 이후 입법 논의의 초점은 혁신 촉진보다는 내부통제와 소유구조 분산 등 공공성 강화로 이동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금융당국은 지분 규제 논의가 이번 사고의 직접적 결과라는 해석에는 선을 긋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빗썸) 사태와 소유 분산 추진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며 “다만 투자자 1100만명, 가상자산 70조원 규모의 시장인 만큼 인프라적 성격이 맞고 금융회사에 준하는 규제와 통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분 제한은 사고의 책임 소재라기보다 ‘공공성’ 관점의 제도 설계라는 설명이다.
정부안과 업계 입장 사이에서 TF도 절충안을 모색하는 모습이다. 안도걸 TF 의원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와 거래소 지분 제한 등 핵심 쟁점을 놓고 합의 가능성을 언급, 조율에 나서겠다고 전했다. 다만 은행 중심 구조와 대주주 지분 규제 등 주요 사안이 이미 정책위원회 단계에서 금융당국 안으로 정리된 만큼, TF 차원의 조정 여지가 크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쟁점 사안에 대한 이견이 여전한 만큼 이달 내 발의는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기업 차원의 변수도 적지 않다. 금융당국이 거래소 대주주 지분을 15~20%로 제한하는 방안을 정부안에 담으면서, 실제 시장 재편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두나무는 네이버파이낸셜과의 포괄적 주식교환을 통해 지배구조를 재편하는 절차를 진행 중인데, 합병 이후 최대주주 지분이 상한 기준을 초과할 경우 일부 지분 조정이 필요해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가상자산 거래소를 ‘공공 인프라’로 보고 지배구조 분산을 요구하는 방향이 제도화될 경우, 개별 기업의 전략과 결합 구조에도 변수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다만 최종 규제 수위와 적용 방식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장부거래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자산이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이중·삼중 확인 절차가 없었다는 점이 핵심”이라며 “레거시 금융은 법과 제도로 통제 구조가 마련돼 있지만, 가상자산은 상당 부분 거래소 자율에 맡겨져 왔다”고 말했다. 이어 “암호화폐 거래가 시작된 지 10년이 넘은 만큼, 이제는 이용자 보호와 시장 안정성을 전제로 한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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