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재한 항공·방산 전문기자] 무기 판매 중심이던 사우디아라비아 방산시장이 현지 생산 및 공급망 구축, 기술이전 등 현지화가 계약의 핵심 조건으로 부상했다. 지난 8일부터 12일까지 사우디 리야드에서 진행된 ‘월드 디펜스 쇼 2026(WDS 2026)’은 이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무대가 됐다. 사우디를 포함한 약 100조원 규모의 중동·아프리카 방산시장을 놓고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방산업체들이 이미 치열한 제안 경쟁에 돌입했다.
◇ 사우디, 50% 이상 현지화 강조
12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사우디는 최근 방위산업 현지화를 추진하기 위해 무기 구매 방식을 바꾸고 있다. 단순 도입에서 벗어나, 합작법인(JV) 설립과 기술이전을 전제로 한 조달 방식으로 점차 전환하는 추세다. 이러한 조달 방식 변화의 배경에는 ‘사우디 비전 2030’이 있다.
사우디 군수산업총국(GAMI)은 지난 2016년 자국 방위산업을 국가 핵심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내용의 ‘사우디 비전 2030’을 발표하고, 국방비의 50% 이상을 사우디 현지에서 무기를 생산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데 사용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그 결과, 2024년 말 기준, 현지화 비율이 24.89%까지 증가했다. 군수산업총국은 단계적 목표를 계획대로 달성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2030년까지 50%를 넘기겠다고 밝혔다.
사우디 국영 방산기업 SAMI(Saudi Arabian Military Industries)와 미국 방산기업 L3해리스가 설립한 합작법인 ‘SAMI-L3해리스 테크놀로지스(SAMI-L3Harris Technologies)’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합작법인은 2019년부터 레이더, 통신, 임무 통합시스템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오던 가운데 지난해에는 사우디의 해양기업 자밀 십야드(Zamil Shipyards)와 자율무인수상정(USV) 공동개발을 위한 양해각서(MOU)도 체결했다. KOTRA는 사우디가 핵심 방산 기술을 자국 내에 축적하려는 전략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 전시장 키워드는 기술이전·현지생산
이번 WDS 2026에서 국내 방산기업들의 전시 메시지는 ‘현지화’에 초점을 맞췄다. 단일 무기 성능을 강조하기보다, 사우디가 비전 2030을 통해 요구하는 현지 생산·정비·운영·산업 기반 구축을 전제로 한 협력 모델이 전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기업들은 무기를 ‘완성품’이 아니라, 현지에서 산업으로 확장 가능한 체계로 제시하며 사우디의 방산 자립 전략에 대응했다.
대표적으로 한화그룹은 육·해·공·우주를 아우르는 통합 전시를 통해 사우디 맞춤형 산업화 패키지를 강조했다. 사막 환경에 최적화한 K9A1 실물 전시, 현지 운용을 고려한 차륜형 장갑차, 그리고 정비·훈련·인프라까지 포함한 ‘토탈 패키지 잠수함 기지’ 제안은 단순 수출을 넘어 현지 운용국가의 방산 생태계 일부로 들어가겠다는 접근을 분명히 보여준다. AI 기반 무기체계와 레이더 전시 역시 기술 자체보다 현지 적용과 확장 가능성에 설명의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KF-21 전투기를 중심으로 생산·MRO·교육 체계까지 포함한 장기 협력 구상을 제시했고, 현대로템은 K2 전차 계열과 무인 플랫폼을 통해 현지 생산과 운용 확장성을 전제로 한 지상전력 패키지를 강조했다. HD현대중공업은 사우디 IMI 조선소를 기반으로 한 단계적 현지 건조와 공급망 구축 방안을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 기회인가, 기술 유출 시작인가
이 같은 사우디의 현지화 드라이브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K방산에 대형 프로젝트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핵심기술 유출과 경쟁국 부상이라는 리스크를 함께 안고 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인도와 터키 등 신흥 방산국들이 과거 서방 방산기업과의 공동생산과 기술이전을 계기로 자체 개발 역량을 키워온 전례를 감안하면, 사우디 역시 ‘공동생산’을 발판으로 중장기적으로는 경쟁자로 성장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때문에 글로벌 방산기업들은 현지화 요구에 따르면서도 기술이전 범위를 엄격히 관리하는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록히드마틴의 사드(THAAD) 부품 현지 생산이다. 록히드마틴은 부품·구성품 제조는 사우디 내에서 허용하되, 핵심 설계와 체계 통합 기술은 본사에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내 업체들 역시 이와 유사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업계 전반에 공유되고 있다. 사우디가 요구하는 현지 생산·정비·교육·훈련 범위는 충족하되, 소프트웨어와 핵심 설계, 신형 탄약 기술 등 전략 기술은 공동생산 대상에서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사우디 비전 2030의 ‘50% 현지화’ 목표가 한국 방산기업에 대규모 투자와 장기 파트너십 기회를 제공하지만 기술 보호와 수익성, 장기 경쟁 구도를 함께 설계해야 하는 K방산의 중동 전략이 실질적으로 검증받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Copyright ⓒ 이뉴스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