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시중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을 상대로 “은행권이 먼저 지배구조 혁신에 과감히 나서달라”며 강도 높은 쇄신을 주문했다. 관행적인 소멸시효 연장 관행을 재고하고, 부동산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에서 벗어나 혁신·중소기업과 취약계층을 향한 생산적 금융으로 자금의 흐름을 바꾸라고도 요구했다.
이 원장은 12일 20개 국내 은행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지배구조개선 태스크포스(TF)에서 조만간 개선방안과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마련될 것”이라며 “은행권이 먼저 지배구조 혁신에 과감히 나서달라”고 밝혔다. 그는 “좋은 일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을 미룰 이유는 없다”며 “필요한 것은 망설임 없이 언제라도 추진하고, 개선이 필요한 것은 반드시 고쳐달라”고 강조했다.
최근 연이어 불거진 금융사고와 소비자 피해 논란 속에서 금융당국 수장으로서 ‘지배구조-소비자보호-포용금융’이라는 3대 축을 전면에 내세워 은행권 체질 개선을 압박한 셈이다. 이 원장은 전날 국회 정무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가상자산거래소 빗썸의 비트코인 대량 오지급 사태와 관련해 여야의 질타를 받은 직후, 은행권을 직접 불러 대면 메시지를 던졌다.
이 원장은 “가용한 모든 역량을 금융소비자 보호에 집중하고자 한다”며 금감원의 정책 기조를 재확인했다. 금감원은 이미 조직을 소비자 보호 중심으로 재편하고, 지난해 12월 ‘금융소비자 보호 개선 로드맵’을 내놓은 바 있다. 이에 따라 정기 검사 시 소비자보호 검사반을 별도로 편성해 상품 설계부터 판매, 사후 관리까지 전 과정을 들여다보고, 금융소비자 보호 실태 평가 체계도 전면 개편해 ‘예방 중심’ 감독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은행권을 향해 “상품 설계부터 판매 전 과정을 재정비하고, 소비자 보호에 중점을 둔 핵심성과지표(KPI) 체계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단순 실적·수익 중심의 KPI에서 벗어나, 소비자 피해 최소화와 민원·분쟁 예방 등 질적 지표를 경영성과 평가에 반영하라는 주문이다.
포용금융 측면에서는 ‘잔인한 은행’ 이미지를 벗기 위한 구체 과제도 제시했다. 이 원장은 “더 이상 은행권이 ‘잔인하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관행적인 소멸시효 연장은 재고해달라”며 “채무조정 프로그램 활성화, ‘생계비 계좌’, 전세 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장기 분할 프로그램’ 등 제도 안내에도 힘써달라”고 말했다. 장기간 연체 이자를 붙이며 채무를 사실상 ‘끝없는 빚’으로 만드는 관행을 줄이고, 취약 차주에게 실질적인 회생 기회를 제공하라는 요구다.
금감원도 중소기업·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연계 공급망 금융’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외상매출채권 담보 대출, 선(先) 정산 대출 등 기업의 거래 구조와 연계된 금융을 확대해, 담보력이 약한 기업도 거래 실적과 공급망 내 위치를 기반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매년 은행별 포용금융 이행 체계와 실적을 종합 평가하는 ‘포용금융 종합체계’도 도입해, 각 은행의 사회적 책임 이행 수준을 체계적으로 점검할 방침이다.
생산적 금융 확대와 관련해서도 이 원장은 “은행권이 부동산 담보 대출 같은 손쉬운 이자 장사에 머무르지 않고, 혁신기업과 중소·중견기업, 청년과 장애인 등 소외계층의 일자리를 지원하는 생산적 자금 공급에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단기·안전 자산 위주의 수익 추구에서 벗어나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자금 배분 구조를 전환하라는 메시지다. 금감원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가계부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자본규제도 합리화해 은행이 실물경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간담회에서 은행장들은 독립성이 확보된 이사회 구축, 공정하고 책임 있는 성과·보수 체계 마련 등 선진적 지배구조 정착에 힘쓰겠다고 화답했다. 개인 채무조정 절차 간소화 등 실무 개선 방안도 함께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배구조 개선 법·제도 개편이 예고된 가운데, 은행권이 얼마나 속도감 있게 내부 혁신에 나설지, 그리고 금감원의 소비자보호·포용금융 평가 체계가 실제 현장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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