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현실로 다가오는 ‘피지컬 AI’ 시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6’의 화두는 단연 ‘로봇’이었다. 그동안 화면 속에서 글자로만 있던 인공지능(AI)이 육신을 얻은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로봇과 자동차에 적용되는 ‘실물 AI(Physical AI)’는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개념증명(PoC) 수준을 넘어 이제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어엿한 하나의 사업으로 자리 잡았음을 속속 내보이고 있다.
로봇·자율주행 최대 이슈 부각
위험하고 복잡하거나 어려운 공정이 필요한 산업 현장에는 이제 로봇과 AI가 빠질 수 없게 됐다. AI를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 적용한 실물 AI가 대세가 되면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기조연설에서 “로봇을 위한 ‘챗GPT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한 발언이 마치 예언처럼 이뤄지는 모양새다.
현대차 그룹이 공개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아틀라스’는 3년 뒤부터 실제 공장에 투입해 부품 분류 등 고위험 작업을 맡기는 것이 목표일 정도로 구체적인 로드맵이 짜였다. 최대 50㎏ 무게의 물체를 들 수 있고 2.3m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영하 20∼영상 40도 환경에서 완전한 성능을 발휘하는 내구성도 갖췄다.
하지만 올해 CES에서 특히 더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산업 현장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로봇이었다. LG전자의 로봇 ‘클로이드’는 빨랫감을 정리하거나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개키는 등 실제 가사 노동을 일부 대신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등장했고, 중국 기업 로보락은 기존의 로봇청소기에 다리를 달아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청소할 수 있는 성능을 뽐냈다. TCL도 사용자 지시에 따라 가전을 제어하는 반려 로봇 ‘에이미’를 선보였다. 다만 아직 움직임이 다소 느리다는 지적과 함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함께 나왔다.
로봇과 함께 ‘피지컬 AI’의 양대 축을 이루는 자율주행 자동차 부문에서는 인간의 개입이 없는 수준의 기술 구현이 시간 문제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상황이 됐다. 웨이모는 현대차와 협력한 6세대 로보택시를 선보였고, 루시드모터스는 우버와 손잡고 ‘드라이브 AGX 토르’ 기반의 로보택시 모델을 공개하며 가세에 나섰다. BMW는 아마존 ‘알렉사플러스’ 기술을 탑재해 자연스러운 대화로 차량을 제어하는 음성 비서를 선보였고, 아마존의 자회사 ‘죽스’는 전시장 밖으로 뛰쳐나와 CES 기간 특정 지점들을 왕래하는 무인 로보택시를 시범 운영해 관람객들을 이목을 끌기도 했다.
한편 엔비디아도 자율주행 플랫폼 ‘알파마요’를 공개하며 기술 경쟁에 뛰어들었다. 공이 도로로 굴러오는 것을 보고 곧이어 어린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추론하는 등 생각하는 자율주행을 표방하는 알파마요는 개방형으로 공개됐다. 완성차 업체들이 엔비디아 플랫폼만 이용하면 자율주행을 도입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실제 엔비디아와 협업한 메르세데스 벤츠는 알파마요를 탑재한 ‘CLA’를 미국 시장에 오는 1분기 출시할 예정이다.
또한 이번 현장은 AI 로봇이나 자율주행의 두뇌에 해당하는 반도체 전장이기도 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6종 부품을 통합한 차세대 칩 ‘베라 루빈’을 공개하자 AMD의 리사 수 CEO는 불과 몇 시간 만에 ‘헬리오스’를 선보이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특히 황 CEO는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인 것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의 일정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기술력으로 압도한 한국 기업
국내 기업들의 활약상도 주목받았다. 삼성전자는 별도로 마련한 단독 전시관에서 ‘당신의 AI 일상 동반자’를 주제로 ‘더 퍼스트룩’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노태문 삼성전자 대표는 “고객들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AI 경험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며 “고객들의 일상 속 AI 동반자가 돼 ‘AI 경험의 대중화’를 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올해 신제품 4억 대에 인공지능(AI)을 적용하는 등 AI 기반 혁신을 가속화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모든 갤럭시 스마트폰, 4K 이상 프리미엄 TV, 와이파이 연결이 가능한 가전에 AI를 탑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모바일은 다양한 AI 서비스를 연결하는 ‘AI 허브’로 진화하며, TV는 모든 프리미엄 라인업에 ‘비전 AI’를 적용해 맞춤형 ‘AI 스크린’ 경험을 제공한다. 가전은 가사 부담을 없애고 수면 및 건강 등 고객의 일상까지 관리하는 ‘홈 AI 컴패니언’으로 거듭난다는 구상이다.
LG전자의 경우 이번 전시회에서 마스코트 역할을 홈 로봇 ‘LG 클로이드’가 맡았다. 클로이드는 스스로 주변을 감지하고 판단하는 가정에 특화된 에이전트다. 류재철 최고경영자(CEO)는 개막 전 열린 LG 월드 프리미어에서 클로이드와 대화하는 모습을 연출해 주목받기도 했다. 클로이드는 무대 위에서 연설자에게 물을 주며 농담하는 등 자연스럽게 소통했고, 젖은 수건을 받아 들고 드럼 세탁기에 집어넣기도 했다. 또한 전시관에서도 빨래를 반복해서 개며 홈 로봇으로서의 역량을 보였다.
이를 두고 LG전자는 클로이드가 그간 꾸준히 강조해 온 ‘제로 레이버 홈’ 비전의 마지막 퍼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류 CEO는 “빨래를 개고 물건을 옮기는 물리적 노동을 넘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덜어주는 것이 목표”라며 “식재료와 일정, 생활 패턴을 종합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단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서 로봇용 액추에이터 브랜드 ‘LG 액추에이터 악시움’을 처음 선보이며 로봇 사업 확장 의지도 분명히 했다.
이처럼 이번 행사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수장들의 글로벌 데뷔 무대로도 화제가 됐다. 지난해 11월 ‘대행’을 떼고 정식 부문장 및 대표이사로 선임된 노태문 대표가 대표 및 DX주문장 자격으로 CES 연단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 대표는 기조연설 후 “삼성전자가 가진 통합된 경험과 AI를 활용해 발전하는 비전을 보여주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역시 지난해 11월 사장에 선임된 류 CEO는 이번 CES 기간 고객사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 전시관을 바삐 둘러보며 비즈니스 기회를 모색했다. 류 CEO는 신임 CEO로서 포부에 대해 ‘근원적 경쟁력 확보’, ‘고성과 포트폴리오 전환’, ‘수익성 기반 성장 구조 구축’이라는 키워드를 밝혔다.
차세대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로 화제의 중심에 섰던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은 4대 그룹 총수 가운데 유일하게 CES 현장을 찾아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 회장은 퀄컴, LG전자 부스를 차례로 찾아 로보틱스, 자동차 협업 가능성을 점검했고 삼성전자 부스에서는 “저희와 같이 콜라보 해보시죠”라며 즉석 제안을 던지기도 했다. 이어 젠슨 황 CEO와 제2의 ‘깐부 회동’을 가지며 양사 간 자율주행차 파트너십에 대한 기대감도 키웠다.
메모리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들의 기술력이 돋보였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고대역폭메모리(HBM)4 16단’ 제품을 공개하며 기술 지배력을 과시했고, 삼성전자 역시 HBM4 양산 계획과 함께 서버용 메모리 모듈 표본을 엔비디아에 공급하며 차세대 칩 탑재 채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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