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한 표정의 노인이 올라 타는 자동차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사이좋게 장식돼 있습니다. '새빨간 대한민국 푸르게 푸르게', '반중친미 한미동맹', '부정선거 한국멸망' 같은 익숙한 슬로건이 다닥다닥 붙은 '빨간색' 차예요. 동네 친구들과 오목을 두다가도 수가 틀리면 판을 뒤집어 버리는 성질머리로 세상과 싸우는 노인의 인생 목표는 '빨갱이 척결'. 모두가 더러워서(?) 피하려 하는 것 같은 노인은 지척에서 뜻밖의 동지와 조우합니다.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젊은 여자죠. 그는 극우 유튜브를 들으며 명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인민복 같은 옷을 고집합니다. 청년의 목표는 노인과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동일한 타깃을 간첩으로 지목하고 그를 처치하려고 합니다.
영화 〈간첩사냥〉
영화 〈간첩사냥〉은 70대 노인 장수(민경진)와 20대 청년 민서(박세진)가 우연한 계기를 통해 동맹을 맺고 간첩을 사냥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난 이들은 사사건건 서로를 못마땅해해요. 그러던 어느 날 장수와 민서는 공통의 적인 탈북자 출신 육군 영훈(허준석)의 집에 각자 잠입했다가 마주치고, 뜻이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노약자 우선", "레이디 퍼스트"를 주장하며 자신이 영훈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치던 두 사람은 결국 전력 강화를 위해 손을 맞잡기로 합니다.
영화 〈간첩사냥〉
하지만 놀랍게도 〈간첩사냥〉은 정치 영화가 아닙니다. 말했듯이 장수와 민서의 뜬금 없는 동맹은 하나의 기치 아래서 성사됐죠. 공조가 이어질수록, '빨갱이 척결'은 명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들이 진짜 목적을 달성하려 반공주의를 이용한 것처럼 영화도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레드 콤플렉스를 하나의 설정으로서 이용합니다. 〈간첩사냥〉이 풍자하는 건 이른바 '태극기 부대'를 자처하는 노인과 극우 청년이 이념으로 대통합(?)하는 현장이 아닙니다. 영화의 반공 사상은 단순한 결속의 아교입니다. 때로는 비겁한 줄 알면서도 무리 속 누군가를 험담하거나 적으로 돌리고 그 현장을 방관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언젠가 타깃이 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움을 안고도 '공공의 적' 만들기를 멈출 수 없는 건, 가장 간단히 무리지을 수 있는 방법이라서죠.
영화 〈간첩사냥〉
그래서 〈간첩사냥〉은 파편화와 타자화로 많은 것이 퇴화했지만 무리짓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현대인의 나약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본능적으로 원하는 건 사회적 동물인 탓입니다. 하지만 '원한다'는 마음을 교환하는 행위는 점점 어려워지죠. 사회가 고도화할 수록 '흑'과 '백', '내 편'과 '네 편' 사이에 무수히 많은 가치관들이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단어만 봐도 신물이 나는 '진정한 소통'이 여전히 문화 콘텐츠의 주제 의식으로서 강한 힘을 갖는 이유이고요.
영화 〈간첩사냥〉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약해 온 52년차 배우 민경진의 '태극기 부대' 연기가 압권입니다. 시나리오를 받은 후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는 느낌을 받으며 읽었다"고 말한 그는 장수가 영화 속 캐릭터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어요. 장수와 민서의 타깃이 되는 영훈 역의 허준석도 보이지 않는 남과 북의 경계에 서서 생존하기 위해 꾸며냈을 얼굴들을 적재적소에 꺼내 놓습니다. 이들의 열연과 짠한 반전들이 연달아 터지는 〈간첩사냥〉은 25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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