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생명을 얻은 콘크리트 잔해' 선유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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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honey] '생명을 얻은 콘크리트 잔해' 선유도공원

연합뉴스 2026-02-11 08:00: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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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봉우리에서 서울시 정수장 거쳐 생태공원 변신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기억을 삭제할 순 없었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콘크리트는 살아남았고 담쟁이넝쿨은 회색빛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한겨울 얼어붙은 선유도공원은 변신을 준비한다.

콘크리트는 알고 있다. 침묵 속에서도 계절과 시간은 흐른다는 것을.

선유도공원 전경 [사진/정동헌 기자]

선유도공원 전경 [사진/정동헌 기자]

◇ 잘리지 않은 미루나무

지하철을 타고 선유도공원으로 가려면 선유도역에서 내려 20분쯤 걸어야 한다.

걷다가 선유교라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는데, 이 다리가 한강에서 유일한 보행자 전용 다리다.

다리 초입에 서면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다. 궁금하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기대감에 설렌다.

칼바람에 뺨이 얼얼하다. 다리를 건너니 널찍한 나무 데크가 깔려있고 그 끝이 한강 조망이 펼쳐지는 전망대다.

강 너머로 정면에 북한산, 왼쪽에 월드컵경기장과 하늘공원이, 오른쪽에 남산타워가 보인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선유도가 섬인 것을.

무지개 모양 선유교 [사진/정동헌 기자]

무지개 모양 선유교 [사진/정동헌 기자]

데크 한가운데 미루나무 네 그루가 우뚝 솟아 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무들이 데크를 뚫고 밑에서 올라와 있다.

데크 공사에 방해가 되는 나무를 자르지 않은 것이다. 나무도 살리고 데크도 살렸다. 초입부터 범상치 않은 공원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조미선 선유도공원 해설사는 나무를 둘러싼 철제 울타리가 선유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공원 방문객을 반기는 미루나무 [사진/정동헌 기자]

공원 방문객을 반기는 미루나무 [사진/정동헌 기자]

◇ 깎여나간 봉우리

선유도공원만큼 특이한 스토리를 가진 공원이 또 있을까.

조선시대 선유도는 섬이 아니라 높이 52.5m의 봉우리 '선유봉'이 있는 육지였다.

'신선이 노니는 봉우리'라는 이름처럼 수려한 경관 때문에 선비들이 배를 띄우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중국 사신들의 필수 관광지이기도 했다.

겸재 정선이 1742년에 그린 '선유봉'에서 우리는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봉우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리고 선유도는 왜 섬이 됐을까.

겸재 정선의 '선유봉' [사진/정동헌 기자]

겸재 정선의 '선유봉' [사진/정동헌 기자]

일제강점기인 1925년 대홍수 후 일본은 한강 유역의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땅을 매립하면서 선유봉의 모래톱과 자갈들을 파갔고, 여의도 비행장 건설에 필요한 흙 조달에도 선유봉의 봉우리는 깎여 나갔다.

강변의 지형과 물길이 바뀌면서 봉우리는 사라졌고 선유봉은 선유도가 됐다.

◇ 살아남은 콘크리트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선유도는 정수장이었다. 강물을 가정용수로 만들어 서울 마포구와 영등포구 일대에 공급했다.

그러다가 새 정수장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정수 기능을 상실하고 폐쇄 기로에 놓였다.

폐정수장 농축조를 재활용한 환경교실 [사진/정동헌 기자]

폐정수장 농축조를 재활용한 환경교실 [사진/정동헌 기자]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어떻게'였다. 한국 건설업계의 풍토라면 당연히 정수장을 깡그리 밀어내고 근사한 새 공원을 조성했을 것이다.

선유도공원은 달랐다. 폐허가 된 콘크리트 구조물들을 그대로 유지한 공원이라는 새로운 착상이 실행됐다.

한강의 절경을 만든 선유봉은 사라졌지만,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대로 남았다.

지금도 취수펌프장, 수질정화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기둥, 약품침전지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폐허처럼 보이던 회색빛 덩어리들이 인간 삶의 기억과 흔적으로 이 공원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콘크리트는 지금 숲과 공존하고 있다.

조미선 해설사는 "자연의 옷을 입은 구조물이 봄과 여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 반드시 와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물놀이터 [사진/정동헌 기자]

환경물놀이터 [사진/정동헌 기자]

◇ 기둥과 줄사철나무의 결합

크지 않은 공원을 천천히 걸어본다.

한강 물의 불순물을 가라앉혀 제거하던 수질정화원과 수생식물원에는 사각형의 수조 안에 연꽃, 백련, 마름, 금불초, 버들, 부레옥잠, 미나리, 부들, 갈대, 꽃창포 등 각종 수생식물이 자란다.

지금은 덩그러니 잿빛 뼈대를 드러낸 수조가 여름이면 녹색의 바다가 된다고 한다.

예쁘고 세련된 화분도 연못도 아닌 투박한 회색 콘크리트 그릇은 오롯이 그 안에 담긴 물풀들로 시선을 잡아끌게 한다.

약품침전지를 재활용해 꾸민 '시간의 정원'은 마치 낡아 허물어질 듯한 콘크리트 기둥 위로 숲이 솟아난 듯 사이좋게 공존하는 모습이 절묘하다.

시간의 정원 [사진/정동헌 기자]

시간의 정원 [사진/정동헌 기자]

느티나무, 목련, 모과나무, 자귀나무, 구상나무, 자작나무도 겨울옷을 입고 있다.

많은 사람이 공원 조경의 하이라이트라고 여길 만한 곳이라면 단연 '녹색기둥정원'일 것이다.

정화된 물이 각 가정으로 공급되기 전 모여있던 대형 수조에서 상판을 걷어내고 판을 지지하던 기둥들에 덩굴나무인 줄사철나무를 하나씩 곱게 덮었다.

줄사철나무는 견고한 몸을 가지게 됐고 콘크리트 기둥은 겨울에도 춥지 않을 두터운 옷이 생겨났다.

줄사철나무가 감싸고 있는 '녹색기둥의 정원' [사진/정동헌 기자]

줄사철나무가 감싸고 있는 '녹색기둥의 정원' [사진/정동헌 기자]

◇ 자연을 애도하는 공원

온실을 작은 식물원으로 꾸며놓았다. 펜타스, 포인세티아, 칼랑코에 같은 외국 식물들이 따뜻한 실내 공간에서 꽃을 활짝 피웠다.

파파야와 레몬 나무, 고무나무가 나란히 숨쉬고 부겐빌레아, 크리스마스야자, 퀴스쿠알리스 인디카, 순버기아이, 솔란드라, 목베고니아 같은 생소한 이름의 식물이 수줍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산업시설과 그 공간들을 생태자원으로 재활용하는 사례는 이미 유럽에서는 오래전 시작됐다.

독일 루르 지방의 폐산업 기지 중 두이스부르그(Duisburg)의 거대한 제철소를 그대로 놔둔 채 공원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선유도 식물원 [사진/정동헌 기자]

선유도 식물원 [사진/정동헌 기자]

국내에선 선유도공원이 한강 최초의 섬 공원이자 국내 최초의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이다.

공원의 북쪽 중앙 예전 정수장 펌프 시설이 있던 곳에 선유정이라는 운치 있는 정자가 서 있다. 선유봉 시절의 풍류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강북 쪽 풍광은 어땠을지 상상해 본다.

사회지리학자인 앨러스테어 보네트는 "도시란 자연을 도려내는 장소인 동시에, 뒤늦게야 자연을 애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떠올리니 선유도공원의 콘크리트 잔해들이 마치 흔적 없이 사라진 선유봉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윤 추구가 당위가 된 도시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의 보존을 소중히 여김이 '인간다움'의 문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공원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온실에 있는 펜타스 [사진/정동헌 기자]

온실에 있는 펜타스 [사진/정동헌 기자]

※ 참고 자료

1. 폐정수장에서 친환경 생태 공원으로(2022, 권다현)

2. 선유도 공원-잊혀진 땅의 귀환(정기용, 2002)

3. 재생이란 시간을 되살리는 것, 선유도공원(최준석, 2015)

4. 공원의 위로(배정한, 2023)

4. '서울의 공원' 홈페이지(https://parks.seoul.go.kr/template/sub/seonyudo.do)

선유정 [사진/정동헌 기자]

선유정 [사진/정동헌 기자]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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