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 최송목 작가 = 명령의 시대가 저물고, 치맥과 깐부의 시대가 열렸다. 지난해 10월, 서울 코엑스 광장에서 목격된 장면은 기업가 이미지가 바뀌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 그리고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나란히 앉아 치킨과 맥주를 즐기는 모습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과거라면 수십 명의 수행원과 철저한 보안 속에 가려졌을 총수들의 동선이 대중의 카메라 앞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 것이다. 이른바 '깐부 회동'이라 불린 이 사건은 단순한 가십을 넘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기업가 정신'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거 대한민국 경제를 일군 창업주들의 리더십은 '맨손 신화'와 '엄근진(엄격·근엄·진지)'으로 대변되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던 시절, 리더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결정권자'였다. 그러나 3·4세 경영 시대로 접어들며 리더십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
이제 대중은 총수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표정으로 누구와 어울리는지에 반응한다. 2025년 12월 실시된 한국갤럽의 '기업인 관련 인식 조사'에 의하면, 기업인의 필수 능력으로 '전문성' 못지않게 '인성 및 도덕성'을 꼽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기업 총수는 관리자를 넘어 하나의 '브랜드'이자 '셀럽'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2,500년 전 전략의 정수 《손자병법》의 첫머리와 맞닿아 있다. 손자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다섯 가지 결정 요소(五事) 중 가장 먼저 '도(道)'를 꼽으며, 이를 "백성들이 윗사람과 뜻을 같이하게 하는 것(令民與上同意, 영민여상동의)"이라 정의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도(道)'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위나 백성의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의미했지만, 현대 경영의 전장에서 이 '도(道)'는 리더와 대중 사이의 '공감과 연결'로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다.
기술의 평준화로 제품 간 변별력이 사라진 오늘날, 소비자는 기업이 내세우는 스펙보다 그 기업을 이끄는 리더의 가치관에 지갑을 연다. 이재용 회장의 소탈한 모습에 삼성 주식을 사고 입사를 꿈꾸는 청년들,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가수 지드래곤이 함께 가상현실(VR) 체험하는 것을 보면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며 호흡하는 모습에서, 구성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현대판 '도(道)'의 실천을 목격한다.
최근 젊은 경영인들은 이러한 '도'의 외연을 글로벌 무대로 넓히고 있다. 김동관 부회장의 민간 외교 활동이나 정용진 회장의 스포츠 마케팅은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니다. 이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글로벌 전장에서 정치인, 주주, 소비자들과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소통이다. 리더 개인의 호감도가 기업의 신용도가 되고, 이것이 곧 투자의 판단 기준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업은 더 이상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숫자와 지시, 위계만으로는 구성원의 마음도, 소비자의 신뢰도 얻을 수 없다. 기업 경영인 역시 성과를 내는 관리자에 머무르지 않고, 회사의 가치와 방향을 몸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기업가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경쟁력이자 전략 자산이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 정치'가 경영의 본질을 가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과의 스킨십이 지배구조 개선이나 실적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대중의 지지는 순식간에 냉소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련된 포장이 아니라, 그 행보와 실질적인 경영 철학이 일치하는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이 진정성이 담보될 때 리더의 소통 행보는 비로소 숫자로 환산되는 경영 전략이 된다. 리더의 호감이 상승하면 브랜드에 대한 심리적 허들이 낮아져 마케팅 비용이 절감되고, MZ세대로 대표되는 핵심 인재들이 기업의 비전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본 확보 비용을 낮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 시장에서의 '리스크 프리미엄(Risk Premium)' 관리다. 평소 쌓아둔 리더의 평판 자산은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시장의 극단적 패닉을 막아주는 강력한 보험 역할을 한다. 투자자들은 리더의 비전과 소통 능력에 '신뢰'라는 프리미엄을 얹어 주가수익비율(PER)을 경쟁사보다 높게 책정한다. 즉, '치맥'으로 대변되는 공감의 행보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기업의 밸류에이션(Valuation)을 결정짓는 '평판 자산(Reputation Capital)'의 전략적 빌드업인 셈이다.
결국 이 시대의 기업가 정신이란, 권위라는 언어를 내려놓고 공감이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다. 손자병법이 말한 ‘도(道)’처럼, 리더와 대중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깐부 회동’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명령의 시대가 저물고, 치맥과 깐부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 상징적 장면이다.
기업가 정신은 지금, 그렇게 다시 정의되고 있다. 명령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지만, 진정성이 담긴 치맥과 깐부의 장면은 신뢰라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npce@dailycnc.com
Copyright ⓒ 소비자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