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안중열 기자]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상향 조정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수요 확대에 따른 반도체 수출 급증이 예상보다 빠르게 실물 지표에 반영되면서, 지난해 1%대에 머물렀던 성장률이 올해 2%대 초반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에 점차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다만 반도체 중심의 성장 경로가 뚜렷해질수록, 미국발 통상 압력과 고환율에 따른 물가 부담이라는 구조적 변수도 동시에 부각되고 있다.
◇2.0%에서 2.1%로…IB들, 한국 성장 경로 다시 그리다
10일 로이터, 비즈니스인사이더 등 외신과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트레이딩이코노믹스 등에 따르면, 주요 글로벌 IB 8곳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평균은 2.1%로 전망했다. 이는 지난해 말 제시됐던 평균 전망치 2.0%에서 0.1%포인트 상향된 수치로, 정부가 제시한 공식 성장률 전망(2.0%)을 소폭 웃도는 수준이다.
기관별로 보면 씨티가 2.4%로 가장 높은 성장률을 제시했고, 노무라와 BNP파리바는 각각 2.3%를 예상했다. UBS는 2.2%, 바클레이스는 2.1%, JP모건은 2.0%로 비교적 보수적인 전망을 유지했다. 반면 뱅크오브아메리카와 HSBC는 각각 1.9%, 1.8%로 여전히 1%대 후반의 성장률을 제시하며 신중한 시각을 유지했다.
특히 상향 폭 자체보다도, 성장률 전망을 끌어올린 공통된 논리가 나왔다. 글로벌 IB들은 공통적으로 “내수 전반의 동시 회복보다는 반도체를 축으로 한 수출·투자 경로가 성장률을 떠받치는 구조가 재형성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숫자가 바꾼 전망…반도체 수출, 이미 ‘서프라이즈’ 구간
이미 시장 예상을 크게 웃돌고 있는 반도체 수출 지표는 성장률 전망 상향의 가장 직접적인 배경이다. 올해 1월 반도체 수출액은 205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00%를 넘는 증가율을 기록했다. 월말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월중 기준 수출 흐름 역시 반도체를 중심으로 뚜렷한 개선세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1월 1~20일 기준 전체 수출은 전년 대비 14% 이상 증가했으며, 이 가운데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70%를 웃돌았다. 이는 반도체 수출이 단순한 회복 국면을 넘어 전체 수출 증가율을 끌어올리는 ‘주도 변수’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IB들은 “이 같은 실물 지표가 기존 전망 모델에 반영되면서, 성장률 상향 조정이 불가피해졌다”고 설명한다. 반도체 업황 개선이 ‘기대’의 영역을 넘어 ‘진행 중인 사실’로 확인되면서, 성장 경로에 대한 판단 자체가 바뀐 셈이다.
◇AI 수요와 공급 제약의 결합…메모리 가격이 성장률로 전이되다
이번 반도체 사이클의 핵심은 물량 증가보다 가격 주도형 수출 확대에 있다. AI 서버 투자 확대에 따라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공급이 이를 즉각 따라가지 못하면서 메모리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들은 올해 1분기 메모리 가격이 전 분기 대비 80~90%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서버용 D램을 중심으로 한 가격 급등은 PC용 메모리 가격까지 끌어올리며, 전반적인 반도체 수출 단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D램 현물 가격 역시 1년 새 8배 이상 뛰며 수출 채산성을 크게 개선시킨 상황이다.
이 같은 가격 상승은 단순히 반도체 기업의 실적 개선에 그치지 않고, 수출액 증가와 교역조건 개선, 설비투자 확대를 통해 성장률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형성한다. IB들 사이에서 “반도체 수출 확대만으로도 올해 실질 GDP 성장률을 1%포인트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GDP 1.6%포인트 기여’의 의미…상단 시나리오의 조건들
일부 시장에서는 반도체 호황이 올해 성장률을 최대 1.6%포인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는 반도체 수출 증가가 순수출 기여도를 크게 높이고, 설비투자와 기업이익을 통해 소득과 소비로 전이되는 상단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 계산이다.
다만 이 같은 수치는 환율 수준, 수입 중간재 가격, 반도체 산업의 국내 부가가치율, 해외 투자 비중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IB 전망치가 1.8%에서 2.4%까지 넓게 분포하는 이유도, 이러한 변수에 대한 가정이 기관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반도체가 성장률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 파급 강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내수는 ‘완만한 회복’…수출과 결합이 관건
일부 IB들은 올해 민간 소비 증가율이 지난해 1%대 초반에서 2%대 중반으로 개선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자산 가격 안정과 확장적 재정 기조가 소비 회복을 일정 부분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수 회복만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뚜렷하다. IB들은 “결국 반도체 중심의 수출 반등과 내수의 완만한 회복이 동시에 작동할 때, 2%대 성장 경로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발 관세 압박과 고환율…성장 경로의 ‘절단 변수’
성장률 상향 전망에도 불구하고, 대외 변수에 대한 경계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산 제품 전반에 대해 최대 25%의 관세 부과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수출 회복세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대미 수출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되고,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 품목의 부진이 성장률 상단을 제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고환율에 따른 물가 부담도 변수로 작용한다. IB들이 제시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평균은 2.0%로, 한 달 전보다 소폭 상향됐다. 다만 원화 약세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이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로 전이되면, 실질 구매력을 제약해 내수 회복 속도가 미뤄질 수 있다.
◇반도체가 만든 2%대 복귀…이제 관건은 ‘전이’
결국 최근의 성장률 전망 상향은 경기 전반의 동시 회복이라기보다, 반도체를 축으로 한 성장 구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성장률 전망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이 반도체 주도 회복이 국민소득과 내수 체감으로 얼마나 전이될 수 있을지, 그리고 관세와 환율이라는 외생 변수가 이 경로를 어디까지 훼손할지가 향후 성장률의 방향을 가를 핵심 변수로 남아 있다. 숫자 이상의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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