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안중열 기자] 미국 정부가 “한국과의 비관세장벽 협상에서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관세 인상에 나설 수 있다”는 초강경 입장을 공식화했다. 미 고위 통상 당국자가 관세 인상 카드를 조건부로 공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미 통상 협상이 원칙과 의지를 확인하는 탐색전을 넘어, ‘가시적 성과’를 담보로 한 실력 행사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9일 국회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최근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인 제이미슨 그리어와의 면담 내용을 공개하며 이 같은 기류를 전했다. 조 장관은 “미국 측은 비관세장벽 협상에서 성과가 없을 경우 관세 인상을 통해 대한(對韓) 무역적자를 강제 조정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윤후덕 의원의 질의는 이번 통상 압박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윤 의원은 “관세 인상을 조건부로 내건다는 것은 협상의 문법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이라며 “비관세 협상 실패를 이유로 관세를 되돌리겠다는 압박이 현실화할 경우, 자동차·반도체 등 핵심 수출 산업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말하는 ‘관리 가능한 수준’이 무엇인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이 준비돼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고 따져 물었다.
◇비관세 성과 없으면 관세…美, 협상 공식 자체 바꿨다
조 장관에 따르면 그리어 대표는 면담 석상에서 주요 교역국별 무역적자 데이터를 직접 제시하며 한국을 압박했다. 그는 “정상 간 합의 이후 미국은 한국 정부에 투자를 요청했지만 이행은 제한적이었고, 비관세장벽 분야 역시 추가 협의가 충분하지 않다”고 직격했다.
협상의 기준은 ‘노력’에서 ‘실적’으로 이동했다. 그리어 대표는 “여러 국가와 동시에 협상 중인 상황에서 한국 시장에만 과도한 시간을 쓸 수 없다”며, 개선 의지나 검토 절차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성과’가 판단 기준임을 명확히 했다.
이어 “협상에 진전이 없다면 감정적 문제가 아니라 행정적 판단에 따라 관세를 인상해 무역적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며 “한국 정부가 이를 엄중히 인식하길 바란다”고 경고했다. 이는 ‘비관세 개선 → 관세 유예’라는 보상 구조를 걷어내고, ‘비관세 미흡 → 관세 인상’이라는 제재 공식을 전면에 내건 사실상의 통상 최후통첩으로 읽힌다.
◇‘시간표 싸움’에 내몰린 韓…국회 책임론까지 확산
정부도 비상 대응 태세에 돌입했다. 조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이 대미 투자 특별법 통과 이전이라도 실무 협상팀을 즉각 가동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법·제도 정비를 기다릴 여유 없이, 협상 테이블에서 곧바로 수치와 로드맵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는 의미다.
윤후덕 의원은 이 대목에서 “국회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인식이 미국 측에 고착될 경우, 그 부담은 산업계와 국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며 “대미 투자와 비관세 개선을 둘러싼 입법·행정 간 역할 분담과 책임 구조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상 압박이 행정부의 외교·통상 역량을 넘어, 국회의 입법 속도와 정치적 판단까지 시험하는 국면으로 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통상에 안보까지 얹힌 ‘패키지 협상’…난이도는 더 높아졌다
문제는 통상 압박이 경제 이슈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 장관은 이른바 ‘한미 안보 패키지’와 관련해 “핵추진 잠수함과 우라늄 농축·재처리 이슈를 논의할 미국 협상팀이 2월 중 방한할 예정”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그는 최근 마코 루비오 장관과의 회담을 언급하며 “각 부처를 포괄하는 미측 협상팀의 방한이 확정됐다”고 설명했다. 통상·투자라는 경제 현안과 핵잠수함, 핵연료 주기 같은 안보 이슈가 하나의 ‘패키지 딜’로 엮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관세 위협을 관리하는 동시에 안보 실익까지 계산해야 하는 한국 정부의 협상 난도는 한층 높아졌다.
이번 관세 경고는 한미 협상이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는지를 미국이 명확히 제시한 첫 사례다. 더 이상 ‘검토 중’이나 ‘추가 협의’라는 외교적 표현은 통하지 않는다. 미국은 비관세 장벽 해소의 의지가 아니라 ‘속도와 결과’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 성적표가 관세 폭탄 여부를 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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