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정치자금을 확보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곳간이 공개됐다. 그 규모는 무려 5400억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국적의 기업인, 유명인 등을 비롯해 미국 외 다른 국가 기업까지 자금의 출처 역시 다양했다. 삼성·SK·현대차 등 국내 기업들까지 자금 출처 명단에 포함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막강한 자금력을 오는 11월 열리는 중간선거에서 여당 후보들을 지원하는 등 공화당의 장기 집권 체제 강화에 활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에게도 대미 네트워크 구축이 더욱 더 중요한 생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의 5400억 개인 금고 채운 'K-머니' 주목…삼성·SK·현대차·한화 모두 생존 안간힘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지난해 말 기준 3억7500만달러(원화 약 5400억원) 상당의 정치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정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다. 미국 공화당전국위원회(RNC)가 보유한 9500만달러(원화 약 1380억원)의 약 4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지난해 미국 민주당전국위원회(DNC)가 보유한 정치자금 1400만달러(원화 약 200억원)와는 14배 가량 차이가 난다.
르데스크 취재 결과 트럼프 대통령의 '금고'에는 국내 기업들의 후원금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현대자동차 미국법인(HMA)은 2025년 1월 6일 100만달러(원화 약 14억6000만원)를 '트럼프-밴스 취임식 준비위원회'(Trump-Vance Inaugural Committee, Inc.)에 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솔루션의 미국법인인 한화디펜스 USA와 한화큐셀아메리카 역시 각각 50만달러(원화 약 7억3000만원)를 후원했다. 삼성전자 아메리카도 31만5000달러(원화 약 4억6000만원)를 해당 조직에 후원했다. 트럼프-밴스 취임식 준비위원회는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의 취임식 관련 행사 기획 및 자금 조달을 위해 설립된 공식 비영리 조직이다.
지난 2024년 트럼프 대통령의 후보 시절 자금 창구로 활용된 각종 PAC(정치활동위원회)의 후원 명단에도 국내 기업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대표적으로 현대자동차는 현지 대리점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PAC에 자금을 후원했다. 미국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뉴욕주 힉스빌에 위치한 '어드벤티지 현대'(Advantage Hyundai)는 지난 2024년 10월 '턴아웃 포 아메리카'(TURNOUT FOR AMERICA)에 10만달러(원화 약 1억4000만원)를 후원했다. 뉴욕주 밸리 스트림에 위치한 '사우스 쇼어 현대(South Shore Hyundai)' 역시 10만달러(원화 약 1억4000만원)를 해당 PAC에 냈다. 턴아웃 포 아메리카는 지난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돕기 위해 설립된 단체로 애리조나, 조지아, 네바다, 노스캐롤라이나 등 경합주 지역에서 선거 캠페인을 진행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자동차 제조사보다 현지 딜러망이 지역 경제와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 특유의 '자동차 딜러 프랜차이즈 법(Franchise Laws)'에 의해 딜러들이 단순한 판매 대행을 넘어 독점적 유통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제정된 이 법안은 본래 거대 제조사의 일방적인 계약해지나 횡포로부터 소상공인인 딜러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현재는 딜러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 테슬라가 직접 판매를 위해 수많은 주 정부와 소송을 벌였던 이유도 바로 이 법 때문이다. 물론 제조사에게도 큰 실익이 있다. 본사가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환경 규제, 수입 관세 조정과 같은 예민한 정치적 현안이 발생할 때 현지 딜러들은 이를 자신들의 생존권 문제로 규정하며 지역 정치인들을 압박하고 있다.
SK그룹은 트럼프 선거 캠페인 PAC에 직접적으로 자금을 투입하지는 않았지만 로비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고액 후원금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로비활동 공개(Lobbying Disclosure Act, LDA) 자료에 따르면 SK그룹의 북미 대관 업무를 총괄하는 SK아메리카스는 지난해 총 577만달러(원화 약 84억원)를 로비 자금으로 지출했다. 대미 로비에 나선 국내 기업 중 가장 큰 규모이자 전년(432만달러) 대비 약 33% 증가한 규모다. SK아메리카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다. SK아메리카스가 LDA 측에 제출한 주요 로비 현안은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이다. 이 법안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공약을 한데 엮은 패키지 법안으로 현재 미국 정부 국정과제 대부분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SK아메리카스는 '실리콘밸리가 가장 사랑하는 로비 기업'으로 불리는 인베리언트(Invariant LLC)의 로라 조슈아(Laura Joshua) 로비스트를 통해서도 상·하원에 14만달러(원화 약 2억원)의 로비 자금을 투입해 자사 반도체 및 에너지 사업에 우호적인 입법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또 코빙턴 앤 벌링(Covington & Burling LLP)의 빌 워커먼(Bill Wichterman), 스퀘어 패튼 보그스(Squire Patton Boggs)의 글렌 윌라드(Glenn Willard) 등 미국 워싱턴 DC 내 유명 로비스트를 통해 공화당 중심의 대관 업무에 박차를 가했다. 빌 워커먼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했던 인물로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였던 빌 프리스트(Bill Frist)의 정책 보좌관을 역임한 이력을 지녔다. 글렌 월라드는 공화당 소속으로 연방선거위원회(FEC) 위원장을 지낸 데이비드 메이슨(David Mason)의 수석 고문(Lead Counsel) 출신이다.
재계 안팎에선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정치자금을 후원하고 전문 로비스트를 통해 상·하원과의 접점을 늘려나가는 국내 기업들의 행보를 두고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한 '보험' 성격의 투자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예고했던 만큼 우리 기업들이 대미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고 현지에서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후원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현지 법인을 통한 합법적인 정치 후원과 인적 네트워크 가동은 미국 현지에서 기업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대응 수단이다"며 "미국의 정세 변화를 면밀히 분석해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것이 기업의 생존력을 높이는 길이다"고 설명했다.
실리콘밸리 거물부터 카지노대부 미망인까지…트럼프 금고 채운 美 '상류사회' 네트워크
미국 재계 거물들과 문화·예술계 유명 인사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자금줄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카지노 재벌 고(故) 셸던 애덜슨 전 샌즈그룹 회장의 배우자인 미리암 애덜슨(Miriam Adelson)이 대표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미리암 애덜슨의 순자산 규모는 올해 1월 기준 약 50조원에 달한다. FEC에 따르면 미리암 애덜슨은 트럼프 대통령 후원을 위해 자신이 직접 설립한 '프리저브 아메리카(Preserve America) PAC'에 약 1억4800만달러(원화 약 2160억원)를 기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한 행사에서 미리암 애덜슨이 자신의 3선 개헌을 위해 2억만 달러가 넘는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금융명가 멜론(Mellon) 가문의 상속자인 티모시 멜론(Timothy Mellon)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든든한 뒷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평소 복지 제도가 자립심을 해친다고 비판하는 등 매우 강한 보수적 신념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티모시 멜론은 2024년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자금줄인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PAC에 약 1억9700만달러(원화 약 2800억원)를 기부했다. 또 지난해 미국 정부 셧다운 당시 미군 장병들의 급여가 끊기지 않도록 1억3000만달러(원화 약 1900억원)를 기부하는 등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과거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빅테크 기업들도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을 의식한 판단으로 풀이된다. ▲팀 쿡(애플)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마크 저커버그(메타) ▲순다르 피차이(구글) ▲젠슨 황(엔비디아) ▲샘 올트먼(오픈AI) 등 주요 빅테크 CEO들은 지난해 1월 트럼프-밴스 취임식 준비위원회에 각각 100만달러(원화 약 14억6000만원)를 기부했다. 특히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2021년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취임 당시 한 푼도 기부하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저커버그 CEO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직접 마러라고 저택을 방문해 취임식 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문화·예술계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자금 후원 행렬이 이어졌다. 전 마블 엔터테인먼트 회장인 아이작 펄머터는 2024년 대선 캠페인 당시 배우자와 함께 트럼프 지지 PAC인 '라이트 포 아메리카(Right for America)'에 1000만달러(원화 약 146억원)를 기부했다. 미국의 유명 컨트리 가수인 제임스 알딘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고 펀드미(Go FundMe)' PAC에 50만달러(원화 약 7억원)를 후원했다. 제임스 알딘은 단순한 금전적 후원을 넘어 대선 캠페인 기간 중 트럼프의 선거 유세 현장에 수차례 동행하고 트럼프 대통령 헌정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전례 없는 규모로 쌓인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자금이 오는 11월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 판도를 뒤흔들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이 지난 대선 패배 후유증과 부채 문제로 자금난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경합주 유세, 맞춤형 타깃 광고 등 압도적인 자금력을 앞세워 물량공세에 나선다면 공화당의 상·하원 과반 확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만약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큰 승리를 거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장기 집권 토대인 개헌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줄리언 젤라이저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교수는 "트럼프의 막대한 정치자금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수준이다"며 "이는 실질적으로 공화당의 중간선거 자금 확대에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자금력이 경합주 선거와 핵심 후보 지원에 집중될 경우 공화당의 의회 장악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간선거 결과 민주당이 우위를 차지한다면 트럼프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따라서 트럼프의 정치자금은 공화당의 승리를 위해 집중 투입될 확률이 높으며 트럼프 본인에게도 이번 선거는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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