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플러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녹나무의 파수꾼', 기억과 후회를 어루만지는 감성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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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플러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녹나무의 파수꾼', 기억과 후회를 어루만지는 감성 애니메이션

뉴스컬처 2026-02-09 16:24:4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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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세계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대개 ‘추리’와 ‘반전’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오래 읽어온 독자라면 안다. 그가 진짜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대상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특히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끝내 전하지 못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녹나무의 파수꾼'은 작가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유난히 결이 다른 작품이자, 동시에 가장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이야기다. 그리고 이 섬세한 정서를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으로 옮긴 이번 영화는, 장르적 외피보다 감정의 결을 얼마나 성실히 따라가느냐가 성패를 가르는 도전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소원을 들어준다’고 전해지는 신비한 녹나무가 있다. 하지만 이 나무는 판타지 장르에서 흔히 소비되는 만능의 기적 장치와는 다르다. 녹나무는 무언가를 ‘이뤄주는’ 존재라기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마음을 잠시 붙잡아 두는 매개에 가깝다. 그래서 작품의 판타지는 거창한 마법이 아니라,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깃든다. 애니메이션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정서를 시각화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출발한다.

'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주인공 레이토는 전형적인 영웅과 거리가 멀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도, 특별한 사명감도 없이 그저 떠밀리듯 ‘녹나무의 파수꾼’이 된다. “계속 포기하고 살아왔습니다”라는 예고편 속 그의 한 마디는 이 인물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즐겨 그려온 ‘상처 입은 보통 사람’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서, 레이토는 사건을 해결하기보다 타인의 사연을 듣고 기억하는 쪽에 더 가까운 존재다. 이 수동성과 망설임이야말로 이야기의 정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가 마주하는 심야의 방문객들 또한 극적인 운명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늦어버린 사과, 끝내 건네지 못한 작별 인사, 마음속에만 묻어둔 고백 같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감정들이 이 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이때 작품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 과거를 바꾸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저 그 감정을 제대로 ‘기억하고 싶을’ 뿐인 걸까. 녹나무가 지닌 힘은 현실을 뒤틀기보다, 기억의 온도를 되살리는 데 더 가깝다.

'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는 이러한 정서를 확장하는 데 유리한 동시에, 자칫 과잉 연출로 감정을 앞질러 버릴 위험도 안고 있다. 공개된 영상에서 드러나는 몽환적 색채와 부드러운 빛의 표현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이 세계가 철저히 ‘감정의 공간’임을 시사한다. 실사 영화였다면 설명으로 흘러갔을 장면들이, 애니메이션에서는 공기와 색감, 움직임만으로 전달될 여지가 생긴다. 이 점에서 이번 영화는 이야기의 본질에 비교적 충실한 형식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공간’의 사용이다. 녹나무는 수많은 사연이 켜켜이 쌓인 기억의 저장소처럼 기능한다. 나무의 거대한 실루엣,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 요소들은 인물의 감정 상태를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장치가 된다. 말보다 풍경이 먼저 말을 거는 방식, 이것이야말로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이유다.

레이토와 치후네의 관계 역시 전형적인 조력자 구도를 넘어선다. 치후네는 그를 이 세계로 이끈 인물이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안내자는 아니다. 오히려 그녀 역시 녹나무와 얽힌 과거를 품은 채,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인물처럼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사제 관계도, 가족도, 연인도 아닌 묘한 거리감 위에 놓여 있으며, 이 미묘한 간극이 이야기의 여백을 만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이 지닌 힘은 눈물을 짜내는 극적 장치가 아니라, 감정을 ‘억지로 밀어 올리지 않는 태도’에 있다. 누군가의 사연은 분명 슬프지만, 작품은 그 슬픔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이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을 조용히 비춘다. 애니메이션이 이 절제의 미학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따라, 작품은 감성 판타지의 수작이 될 수도, 혹은 과도한 감정 연출에 기댄 평범한 힐링 서사로 남을 수도 있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한 시선이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잊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남고 싶어 한다. 녹나무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이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적이라기보다, 자신의 감정이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는 증거다. 작품은 그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바람을 판타지의 언어로 번역한다.

'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녹나무의 파수꾼'.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결국 '녹나무의 파수꾼'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렸지만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신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시간 속에 남고, 또 어떻게 타인의 기억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는 이 질문을 빛과 색, 음악과 침묵으로 다시 한 번 되묻는다. 거대한 녹나무 아래에서 펼쳐질 수많은 사연들은 화려한 사건 대신, 우리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잊고 지냈던 감정 하나쯤을 조용히 꺼내어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건네는 영상 언어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봄 극장가에서 이 애니메이션이 관객에게 남길 여운은, 아마도 커다란 반전이 아니라 아주 작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는 마음의 파문일 것이다. 3월 개봉.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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