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 확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인공지능(AI) 서버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비중이 확대되면서 PC·모바일용 범용 메모리 공급이 줄어들고, 그 여파가 미국 빅테크 실적부터 전자제품 가격, 지역 유통시장까지 단계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AI 인프라 투자가 메모리 수급 구조에 변화를 주면서 글로벌 산업 지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빅테크를 둘러싼 불확실성도 확대되는 모습이다.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공급하는 퀄컴은 2026회계연도 2분기 매출 전망치를 102억~110억달러로 제시해 시장 예상치(111억1000만달러)를 밑돌았고, 이에 주가는 하루 만에 8.46% 하락했다. 퀄컴은 휴대폰 부문 매출이 전년 대비 13% 감소할 것으로 예측, 메모리 공급 제약이 실적 가이던스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가이던스는 전적으로 메모리 공급 제약의 영향을 받고 있다”며 “수요 자체는 견조하다”고 말했다. 엔비디아 역시 메모리 수급 여건에 따라 차세대 GPU 출시 일정이 조정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는 가운데, 젠슨 황 CEO는 “올해 메모리 수요가 공급을 웃돌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했다. 애플도 최근 실적 발표에서 “올해 1분기부터 메모리 가격 상승의 파급력이 이전보다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가격보다 공급 물량이 더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HBM 중심의 설비 증설이 이어지면서 PC·모바일용 범용 메모리 신규 증설이 둔화됐고, PC용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은 1년 새 각각 수백 퍼센트 상승했다. 핵심 부품 가격이 오르면서 완제품 가격도 함께 움직이고 있다. 최근 1년간 노트북 평균 판매 가격은 20% 이상 상승, 태블릿PC 역시 오름세를 보였다. 고용량 메모리를 탑재한 프리미엄 제품일수록 인상 폭이 컸으며, 올해 출시된 일부 AI 노트북은 출고가가 300만원을 넘겼다.
소비자 체감 부담도 확대되는 분위기다. 조립 PC와 게이밍 PC 가격은 수개월 만에 40~50% 인상됐고, 기본형 D램 가격이 반년 만에 5배 이상 오른 사례도 확인된다. 신학기 수요가 이어지는 시점이지만 전자상가 방문객은 예년보다 줄었다는 게 현장 설명이다. 상인들은 “부품 확보 자체가 쉽지 않은 데다, 확보하더라도 가격 부담으로 판매가 원활하지 않다”며 “월 단위 거래가 연 단위 선계약으로 전환되면서 중소 유통망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완제품 신규 구매 대신 중고 제품으로 수요가 이동하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지만, 중고 가격 역시 동반 상승하고 있다.
전방 산업 전반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칩플레이션’ 흐름은 서비스 영역으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글로벌 클라우드 사업자들은 데이터 전송 요금과 AI 학습용 GPU 사용료 인상을 잇달아 예고했다. 반도체 가격 상승과 AI 인프라 투자 확대에 따른 비용 부담이 서비스 요금에 반영되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PC용 D램과 서버용 메모리 가격이 분기 기준 두 자릿수 이상 추가 상승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하드웨어 가격 상승이 클라우드 요금 인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기업과 가계의 고정비 부담을 키우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 같은 수급 변화의 배경으로는 메모리 공급망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서버용 HBM 중심으로 생산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 거론된다. 업계에 따르면 고부가 AI 메모리 비중이 커지면서 범용 D램·낸드 신규 증설 속도는 둔화된 상태다. 이와 맞물려 글로벌 PC 업체들이 중국 창신메모리(CXMT) D램에 대한 검증 작업에 나서는 등 공급 불확실성에 대비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 낸드 강자인 YMTC도 D램과 HBM 시장 진입을 추진 중이다. 미·중 반도체 규제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AI 수요 급증이 만든 병목 국면에서 중국 업체들이 단기적인 반사이익을 얻는 역설적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단기적으로 중국 기업들이 물량 공백을 보완하며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미·중 갈등과 한국 메모리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고려할 때, 중장기적으로 시장 점유율 구도가 급격히 바뀔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시각도 제기된다.
메모리 공급망의 핵심 축인 한국 기업들을 둘러싼 협상 환경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일부 고객사는 가격 변동성을 반영해 사후 정산 방식을 도입, 차세대 HBM 공급 시점을 앞당겨 달라는 요청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HBM 중심의 생산 전략이 확대될수록 범용 메모리 물량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은 구조적 변수로 언급된다. 범용 제품 공급이 제한될 경우 세트 산업 전반의 생산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이 과정에서 중국 업체들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는 시각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흐름을 단기 가격 변동이 아닌 AI 중심 공급망 재편의 결과로 보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메모리 공급난이 워낙 심각해 단기적으로는 중국 D램 업체들이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미·중 관계와 한국 기업들의 기술 경쟁력을 고려하면 글로벌 메모리 시장 구도가 급격히 흔들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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