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 9번째 인물 선정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잊힌 고려인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작업이 고려인 후손의 자긍심을 세우고 국가의 책임을 환기하는 계기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이사장 이천영)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함께 추진 중인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은 아홉 번째 인물로 독립운동가 김관덕(출생연도 미상~1921) 선생의 삶과 항일투쟁을 재조명했다.
이번 기록은 한 인물의 전기를 넘어, 이름과 기록을 충분히 남기지 못한 채 전장에서 쓰러진 고려인 출신 독립군의 공통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관덕 선생은 주목받는 영웅이라기보다, 총성이 이어지던 전선 한복판에서 조국이라는 이름을 붙들고 생을 마친 인물이다.
1920년대 연해주 일대에서는 다수의 고려인 독립군이 활동했다. 이들 가운데는 1921년 이만(달레네친스크) 전투에서 전사한 김관덕 선생과 같은 무명 독립군들도 포함돼 있다.
1921년 3월 이후 서간도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군비단은 중국 길림성 장백현을 떠나 연해주 이만으로 집결했다. 자유시참변 이후 흩어졌던 독립군들은 생존이 아닌 재기를 위해 다시 모였고, 연해주에서 상해파 인사들과 연합해 독립군 양성에 나서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같은 해 9월 이만에서는 고려의용군사의회가 조직되고 사관학교가 설립됐다. 열악한 망명지 환경 속에서도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를 공유한 청년들이 모였고, 이 사관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대한의용군이 조직되며 연해주는 다시 무장투쟁의 거점이 됐다.
그러나 전황은 냉혹했다. 1921년 말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은 하바롭스크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고, 첫 공격 대상이 이만이었다. 12월 4일 대한의용군 제2중대가 이만 방어전에 투입됐으나,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과의 전투는 시작부터 열세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생존자 세 명을 제외하고 제2중대는 전원 전사했다. 그 한가운데 김관덕 선생이 있었다. 제2중대 헌병이자 중대원이었던 그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삶은 그날 이만에서 멈췄지만, 선택은 조국을 향한 결단으로 남았다.
이후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 역사 속에서 충분히 불리지 못했다. 전선에서 쓰러진 많은 고려인 독립군처럼 기록의 바깥에 머물렀다. 그러나 침묵이 곧 망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김관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며 항일 공적을 공식적으로 기렸다.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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