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구본준의 ‘반도체 꿈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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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구본준의 ‘반도체 꿈ʼ

한국금융신문 2026-02-09 05: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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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성 산업총괄국장[한국금융신문 최용성 기자] 구본준 LX그룹 회장은 자신의 마흔일곱 번째 생일을 고통스럽게 맞았다. 1998년 12월 24일이다. 구 회장이 양력으로 생일을 쇠는지 어떤지 알 길은 없다만, 그날은 외환위기 시절 반도체 빅딜을 둘러싸고 1년 내내 이어지던 재계 불협화음이 폭발한 날이었다.

현대와 LG 통합 반도체 회사의 경영을 누가 맡을지를 놓고 미국 전문 평가회사에 심사를 맡겼는데, 적격자로 현대가 선정된 것이다. 환영 입장을 밝힌 현대 측과 달리 LG는 “독단적으로 이뤄진 평가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 맨 앞에 구본준 당시 LG반도체 사장이 있었다.

그리고 28년 세월이 흘렀다. AI(인공지능) 열풍을 타고 K-반도체 실적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질주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례 없는 D램 수퍼 호황으로 올해 영업이익 ‘쌍 100조 원’ 시대를 열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AI 데이터센터 증설 트렌드가 이어지면서 이런 초호황 기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DS부문 김재준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메모리 제품 전반에서 공급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했고, SK하이닉스 송현종 사장도 “메모리 공급 능력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극심한 수급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신기록 행진을 바라보는 구 회장 심정은 몹시 착잡할 것 같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LG가 반도체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인지상정일 테니까. 이미 LG와의 연을 정리한 구 회장이지만, 한때 LG 반도체사업을 진두지휘했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제 구 회장은 반도체에 진심이었다. 당시 여느 재벌가 자제들과 달리 이과 출신 오너 경영자였던 그는 반도체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독한 승부사 기질로 1990년대 LG반도체를 이끌었고, 세계 최초 기술을 잇따라 선보이며 삼성을 위협했다.

금쪽같은 반도체사업을 넘겼지만 구 회장은 마냥 손 놓고 있지 않았다. ‘반도체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에 반도체 설계 전문회사(팹리스) 실리콘웍스를 세웠다. 현재의 LX세미콘이다. LG에서 분리해 나온 후 구 회장은 LX세미콘을 매출 2조 원대, 국내 1위 팹리스 기업으로 성장시키며 ‘1등 DNA’를 다시 한번 입증해 냈다.

주력 분야인 디스플레이 구동칩에 이어 차량용·전장용 반도체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종합 반도체 기업(IDM)으로 키우겠다는 야심도 내보였다. 이를 위해 중견 시스템 반도체 기업 매그나칩반도체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말 LX가 5,120억 원을 들여 그룹 사옥을 매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LX는 매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차입 경영의 전통을 깨고 사상 첫 공모 회사채까지 발행하며 약 2,000억 원대 빚까지 졌다.

사옥 매입과 관련해 LX 측은 연간 150억 원대 임차료 비용을 절감하고, LG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됐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재무적 효율성과 브랜드 가치 제고 측면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LX홀딩스는 그룹 사옥을 마련함에 따라 매년 영업이익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임차료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계열사로부터 받을 임대 수익으로 현금흐름 안정성이 크게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해 회사채 발행 전력이 없어 별도 신용등급이 없던 LX홀딩스에 ‘AA-’라는 신용등급을 부여했다. LX홀딩스 측은 “사옥 매입은 그룹 차원의 미래 준비에 있어 중장기 자산가치 제고 및 지속 성장기반 구축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구 회장이 사옥 매입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부었어야 했는지에 대해선 생각이 복잡해진다. 기회비용이 적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옥 매입가 5,120억 원은 지주회사 LX홀딩스 자산총액의 27%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단순한 부동산 투자를 넘어, 그룹 명운을 건 베팅이다.

규모 있는 반도체 관련 기업을 인수할 수 있는 액수다. 국내외 유망 전장 반도체 기업이나 AI 반도체 설계회사를 찾아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쟁력 있는 기업 인수, 과감한 투자를 통해 그룹 미래 포트폴리오를 통째로 바꿔 놓을 기회로 볼 수는 없었을까.

간단치 않았겠지만, 구 회장은 그룹 사옥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리스크를 감내하는 불도저식 확장만 고집하기에는 경영 환경 불확실성이 너무 커진 게 현실이다. 실물 자산을 확보해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고, 나중을 도모하겠다는 ‘도광양회’ 노련함이 그 결정 뒤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그 선택은, 야만의 시대를 거치며 산업화를 이끈 오너 경영자가 무대 뒤로 퇴장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 그도 7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물론 달라질 것은 없다. 사옥 매입 키워드가 ‘안주’가 아니라 ‘도전’이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쩌면 새로 마련한 사옥 안에서 구본준 회장 자신이, 혹은 누군가 새로운 승부사가 조용히 반전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구본준 몸속에 아직도 ‘1등 DNA’가 흐르고 있음을 자신 있게 보여줘야 한다.

최용성 한국금융신문 기자 cys@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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