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데레사 더봄]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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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데레사 더봄] 나중에

여성경제신문 2026-02-08 13:00:00 신고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임 /챗GPT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임 /챗GPT

아버지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먼지가 쌓인 책상과 책더미, 지금은 잉크도 나오지 않는 만년필 한 자루와 연필, 연필깎이, 닳아빠진 지우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다. 나는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누가 글을 연필로 쓰냐며 핀잔했지만, 아버지는 항상 자신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셨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늘 깔끔하게 깎인 연필을 사용하고 글을 고칠 땐 지우개를 사용했다.

아마 수십 년은 사용했을 만년필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나 서문에 써야 할 사인을 할 때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설명하지 않았으며, 원고 마감이 다가와도 바쁜 티를 내지 않았다. 다만 늘 “나중에”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 말이 싫어 어른이 되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와 나에게 ‘나중에’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바쁘고 치열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나중에’를 믿고 살기엔 세상은 너무 냉혹했고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는 청소년 시절 꿈이었던 방송 피디(PD)가 되었다. PD라는 직업은 현실을 어떤 각도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늘 시간이 없었다. 회의실과 촬영장, 편집실을 오가며 하루를 쪼개 쓰는 삶. 싱글 대디가 된 뒤에도 나의 일정표는 비워지지 않았다. 비워진 자리는 늘 집이었고, 그 빈자리를 아들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조용했고, 기다릴 줄 알았으며, “괜찮아”라는 말을 잘했다. 엄마 없이도 너무 잘해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그 말이 진심이라 믿어 버렸다. 오늘 아침에도 아침밥도 챙겨 주지 못한 채 나오는 나에게 아들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빠, 이거 시험 같은 건데 한번 풀어봐.”

“응, 알았어.”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 후, 코트 주머니에 종이를 접어 구겨 넣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커피부터 내린다. 나의 하루 중 유일하게 ‘잠깐 멈춤’의 순간이다. 커피 머신이 내는 일정한 소음은 스튜디오의 백색소음과 닮았다.

작가와의 아침 회의가 끝나자, 오늘 섭외한 게스트가 늦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들어온다. 나는 “그럼 순서 바꾸죠”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세 가지 대안을 동시에 떠올려야만 한다. 방송은 계획의 예술이 아니라, 계획이 무너질 때를 대비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리허설 시간. 카메라 동선이 살짝 어긋난다. 나는 손짓으로 조정하고, 말로는 부드럽게 부탁한다. “조금만 왼쪽으로요.” 말의 온도는 늘 중요하다. PD는 권위보다 신뢰가 오래간다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본방송이 시작되면 초 단위로 쪼개진 시간 위를 걸으며 귀와 눈과 손을 동시에 쓴다. 큐를 주고, 상황을 듣고,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미리 끌어당겨 본다. 게스트의 말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 광고 직전, 정확히 맞춰 들어가는 음악. 그 순간에야 비로소 짧게 숨을 쉰다.

해가 기울 무렵에서야 편집실로 이동한다. 이제야 잠시 편집실 안락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본다. 문득, 아침에 아들이 준 쪽지가 생각났다. 코트 주머니를 뒤져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어 보았다.

맨 위에 ‘끝까지 다 읽어 보고 3분 안에 문제를 푸시오’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는 꽤 많은 문제가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라는 것이 고작 숫자를 쓰라거나, 동그라미를 그리라거나, 이름을 거꾸로 써 보라는 등 아들이 풀기에도 너무 쉬운 문제들이었다.

‘자식이~ 이런 문제를 왜 풀라는 거야?’

갑자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다시 종이를 접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돌아오니 아들은 잠들어 있고, 어머니가 다녀가셨는지 식탁 위에는 된장찌개와 반찬 몇 가지가 상보에 씌워져 있다. 그리고 작은 수첩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네 아버지 것이란다. 왠지 너에게 가져다줘야 할 것 같아서···’

수첩을 펼치니 짧은 문장들이 계속 쓰여 있었다. 날짜가 적혀 있고 비가 왔다는 이야기, 점심으로 먹은 국수가 짰다는 이야기, 그리고 “네가 웃었다”라는 문장.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건 기록이 아니라 연습이다. 멈춰서 보는 연습, 순간을 간직하는 연습, 나중에 기억하는 연습, 후회하지 않는 연습···’

나는 수첩을 덮으며 처음으로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나중에’를 아버지처럼 되뇌어 보았다. 그때 아들이 방에서 나온다.

“아빠!”

“응, 왜 일어났어?”

“궁금해서. 아빠, 내가 준 문제 풀었어?”

“아니, 몇 문제 풀다가··· 시간이 없어서···”

“아빠, 그 문제 풀지 않아도 되는데?”

“응?”

“시험지 맨 위에 끝까지 다 읽어 보고 풀라고 쓰여 있는데 못 봤어?”

나는 코트 주머니를 뒤져 접힌 종이를 찾아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맨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끝까지 읽어 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를 풀 필요는 없습니다. 시험지에 이름만 쓰십시오.>

“성당 수녀님이 주신 시험지야. 나는 문제에 나와 있는 대로 다 읽은 후에 이름만 썼는데, 아빠는 너무 바빠서 문제를 제대로 못 읽었나 봐.”

“응, 그랬나 봐. 나중에 제대로 읽을게. 아빠가 미안해.”

나는 오랜만에 아들을 힘껏 껴안았다.

여성경제신문 조데레사 논술교사·미니픽션 작가 abila315@daum.net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조데레사(필명 조이풀) 미니픽션 작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오랜 세월 아이들에게 국어와 논술을 가르쳐 왔으며 현재도 교육 현장에서 활동 중이다. 미니픽션 작가회 회원으로 매년 무크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새벽 6시> , <달팽이의 꿈> , <기적> , <잘 있거라 나는 간다> , <새생명프로젝트> 등이 있으며 미니픽션의 매력에 빠져 꾸준히 연구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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