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백제의 수도 사비의 아침 공기는 늘 물기를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왕궁 뒤편 수로를 따라 흐르던 물소리, 조회를 알리는 발걸음, 그리고 어쩌면 아주 가늘게 울렸을 한 줄기 피리 소리까지. 이번에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유물 몇 점이 아니라, 1,500년 전 백제의 하루를 구성하던 ‘소리와 기록’의 흔적이다. 흙 속에 잠들어 있던 나무 조각과 대나무 관 하나가 사비 도성의 숨결을 현재로 끌어올렸다.
국가유산청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진행한 관북리 유적 16차 발굴조사에서는 총 329점의 목간과 가로로 부는 관악기, 횡적 1점이 확인됐다. 사비기 왕궁지로 인식되는 이 일대는 대형 전각과 수로, 도로 시설이 드러난 핵심 공간으로, 백제 중앙 권력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이번 성과는 왕궁이 어떤 풍경과 질서 속에서 운영됐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당 건물지 인근 구덩이에서 출토된 대나무 횡적이다. 길이 22.4cm가량 남은 이 악기에는 네 개의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고, 한쪽 끝이 막힌 구조임이 엑스레이 분석으로 확인됐다. 내부 유기물 분석 결과 인체 기생충란이 검출되면서 이 공간은 왕궁 부속 화장실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치와 의례의 중심 공간 옆, 가장 인간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악기라는 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횡적은 오늘날의 소금과 유사한 형태로, 삼국시대를 통틀어 실물이 확인된 첫 관악기 사례다. 문헌과 회화, 공예품 속 형상으로만 짐작하던 백제 음악이 물질적 실체를 갖게 된 순간이다. 보이지 않던 ‘소리의 역사’가 손에 잡히는 문화유산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발견은 음악사와 고고학의 경계를 함께 넓힌다.
관북리 발굴의 의미는 소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량 출토된 목간은 사비 천도 직후 백제 국가 운영의 내부를 드러내는 기록물이다. 간지년이 적힌 목간을 통해 제작 시기를 특정할 수 있었는데, 경신년과 계해년은 각각 540년과 543년에 해당한다. 이는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직후의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목간에 적힌 내용은 인사, 재정, 행정 전반을 아우른다. “공적이 넷인 도족이를 소장군으로 삼다”라는 문구가 적힌 편철 목간은 인물의 공훈과 관직 임명을 기록한 인사 문서다. 추상적 제도가 아니라, 실제 인물의 경력과 승진이 기록된 행정의 현장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삭설로 남은 목간 부스러기들 역시 의미가 크다. 월 단위 식량을 기록한 장부, 물자 관리와 관련된 내용들은 국가 재정 운영이 세밀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나무 표면을 깎아 내용을 고치고 다시 기록한 흔적은 문서 행정이 반복되고 갱신되는 과정까지 드러낸다. 백제의 행정은 기억이 아닌 기록 위에 세워져 있었다.
행정 구역 체계를 보여주는 목간도 다수 확인됐다. 도성의 상·전·중·하·후부 5부 체계와 함께 웅진, 하서군, 나라, 요비성 같은 지명이 등장한다. 이는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통치 네트워크가 사비 천도 이후 어떻게 재편됐는지를 보여주는 실증 자료다. 왕궁은 정치적 상징을 넘어 행정 질서가 생산되던 공간이었다.
목간에 보이는 다양한 어휘는 문화 교류의 흔적도 전한다. 입동 같은 절기 표현, 약초로 보이는 명칭, 그리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글자로 여겨지던 ‘전(畑)’ 자의 사용은 동아시아 문자 문화가 활발히 오가던 흐름을 보여준다. 작은 나무 조각에 새겨진 글자 하나가 바다를 건너 이어진 지식의 이동을 암시한다.
결국 관북리 유적은 두 갈래의 시간을 복원한다. 하나는 피리의 숨결 속에 담긴 순간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목간의 글자로 이어진 축적의 시간이다. 소리는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소리마저 물질의 형태로 남았다. 기록은 원래 남기 위한 것이었고, 음악은 사라지기 위해 존재했는데, 그 경계가 뒤집힌 셈이다.
사비의 왕궁은 더 이상 돌과 기단만 남은 고요한 유적이 아니다. 사람을 임명하고, 곡식을 계산하며, 의례를 준비하고, 음악을 연주하던 살아 있는 도시의 표정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관북리에서 건져 올린 나무와 대나무는 조용히 말한다. 백제는 정교한 행정의 나라였고, 깊은 울림을 품은 문화의 나라였다고.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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