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사랑이 가장 뜨거운 순간, 이미 파멸은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린 램지의 신작 ‘다이 마이 러브’는 그러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사랑이 끝나는 이야기라기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품을 수 있는지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기보다는, 한동안 가슴 어딘가가 쑤신 채로 남는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된다.
작품은 출산 이후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는 부부, 그레이스와 잭슨을 따라간다. 한때는 불꽃처럼 타올랐던 관계. 몸이 먼저 반응했고,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삼켜버릴 듯 사랑했던 두 사람.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뒤, 그들의 세계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진다. 부부관계는 사라지고, 대화는 비어가며, 침묵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한다. 사랑이 식었다기보다, 사랑이 다른 형태의 괴물로 변질된 느낌에 가깝다.
린 램지는 설명 대신 감각으로 관객을 밀어붙인다. 인물의 심리를 친절하게 해설하지 않는다. 대신 숨 막히는 사운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선, 갑작스럽게 파열하는 감정의 폭발을 통해 그레이스의 내면을 체험하게 만든다. 관객은 이야기를 ‘이해’하기보다, 상태를 ‘겪게’ 된다. 영화가 “두 시간 동안 숨도 못 쉬게 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사는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고, 감정은 논리보다 먼저 폭주 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영화가 모성을 미화하지도, 악마화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레이스라는 한 인간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해서 붕괴하는 인물. 사회가 기대하는 ‘엄마’의 모습과 실제 감정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영화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레이스의 분노와 슬픔, 공허와 광기는 과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현실처럼 느껴진다.
이 중심에는 제니퍼 로렌스가 있다. 그는 작품에서 ‘연기한다’기보다 거의 소모된다. 얼굴은 점점 메말라가고, 눈빛은 초점을 잃고, 몸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감정에 잠식된 사람처럼 보인다. 스타의 아우라를 지워버리고 인물의 파편만 남긴 선택은 대담하다 못해 위태롭다. 왜 해외 언론이 그의 연기를 두고 “광란의 쇼케이스”라고 표현했는지, 스크린을 마주하는 순간 납득하게 된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창 속에서 꿈틀대는 생생함으로 관객을 붙든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잭슨 역시 흥미롭다. 그는 가해자도, 완전한 피해자도 아니다. 무너지는 아내를 보면서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사랑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붙잡고 싶지만 도망치고 싶은 사람. 이 모순 덩어리 같은 태도가 영화의 또 다른 비극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끝내 같은 곳을 보지 못한다.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그 사랑이 서로를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장 잔혹한 점이다.
'다이 마이 러브’는 관계의 파탄을 다루면서도 자극적인 사건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미세한 균열, 말 한마디의 온도, 손길이 사라진 침대의 공기를 집요하게 쌓아 올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감정이 한계를 넘어서면, 영화는 주저 없이 파열음을 낸다. 그 파열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튄다. 그래서 영화는 편안하게 소비되는 드라마가 아니라, 몸으로 견뎌야 하는 경험에 가깝다.
결국 작품이 말하는 것은 “사랑이 끝났다”가 아니다. “사랑이 너무 컸다”에 가깝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뜨거웠고, 그래서 타버렸고, 재가 된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감정. 한때 가장 빛났던 순간이 가장 잔혹한 기억으로 뒤바뀌는 아이러니. 린 램지는 그 잿더미를 끝까지 들여다본다.
작품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를 얼마나 높이 들어 올렸다가, 같은 힘으로 바닥까지 내던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다이 마이 러브’는 그 추락의 궤적을 끝까지 따라간다. 그래도 우리는 또 사랑할 것인가. 그 질문이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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