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의 권력 지형이 바뀌고 있다. 창업주와 오너가 직접 회사를 이끌던 전통적인 경영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개발(R&D)과 글로벌 사업 경험을 갖춘 전문경영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가족 경영'보다 '기술 경영'이 더 중요해진 시대. 신약 하나가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산업 특성상, 더 이상 상징적인 리더십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제약·바이오판 세대교체가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초부터 변화는 구체화되고 있다. 명인제약은 창업주 단독 체제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인 공동대표 체제로 전환을 예고했다. 주주총회를 거쳐 선임될 예정인 신임 경영진은 오랜 기간 제약 현장을 누빈 인물들로, 연구개발과 영업, 글로벌 사업 경험을 두루 갖춘 '실무형 리더'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글로벌 기술수출과 신약 개발을 직접 지휘했던 인사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회사 운영의 무게중심도 '성장 전략'과 '파이프라인 확대'로 이동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상장 이후 투자자 신뢰를 높이기 위한 포석이자,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본격 신호탄으로 해석한다.
바이오 플랫폼 기업 알테오젠 역시 창업주 중심 구조에서 전문경영 체제로 무게추를 옮겼다. 새 대표는 사업개발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총괄해 온 인물로, 해외 제약사와의 기술이전 협상 경험이 강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대표 교체 이후 단기간에 대형 기술이전 계약을 성사시키며 성과를 입증했다.
플랫폼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업 특성상, 연구개발 못지않게 협상력과 네트워크가 중요한 만큼 '글로벌 딜 메이커'형 경영인의 필요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단순한 내부 관리가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직접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HLB도 마찬가지다. 수차례 미국 식품의약품청(FDA) 허가 문턱에서 고배를 마신 뒤, 연구개발과 해외 임상 경험을 갖춘 전문경영인을 전면 배치하며 재정비에 나섰다. 신약 허가 재신청과 동시에 조직 체계를 손질하며 '연구 중심 회사'로 체질 개선을 시도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경영 구조를 바꾸는 배경에는 산업 환경의 근본적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는 복제약 중심의 안정적 매출 구조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신약 개발 성공 여부가 기업가치와 직결된다. 임상, 규제 대응, 글로벌 파트너십, 기술수출까지 복잡한 과정을 통합 관리해야 하는 만큼 고도의 전문성이 필수다.
여기에 '오너 리스크'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최고경영자의 사적 문제나 의사결정 논란이 발생할 경우, 수년간 준비한 신약 파이프라인과 기업 신뢰도가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글로벌 제약사들은 계약 체결 시 지배구조 안정성과 투명성을 중요한 평가 요소로 삼는다.
전문경영 체제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는 동시에 투자자와 해외 파트너에게 '지속 가능한 경영 구조'라는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오래전부터 가족 경영을 벗어나 전문경영 체제를 도입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시장에서는 앞으로 이런 변화가 더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견·중소 바이오기업들도 기술력과 임상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고, 이사회 중심의 책임 경영 체계도 점차 강화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이제 제약·바이오 기업은 '누가 창업했는가'보다 '누가 신약을 성공시킬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며 "전문경영인 체제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에 가깝다"고 말했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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