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대한민국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반드시 성사시키고 싶었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K-팝을 평양 시민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평양 한복판에서 울려퍼질 K-팝이 북한 사회에 어떤 나비의 날갯짓이 될지 궁금했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아이돌 그룹이 레드벨벳뿐이었다(솔직히 팀 이름에 'Red'가 들어가 있는 것도 참작했다).
백지영 님은 노래를 워낙 잘하시는 분이기도 하고, 그가 부른 <총 맞은 것처럼>을 평양 시민들이 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무척 재미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윤도현 님은 개인적으로 '최애' 가수였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던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이 최근 출간한 <판문점 프로젝트>에서 밝힌 일화다. 2018년 3월 말에서 4월 초 당시 평양에서 개최됐던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에 레드벨벳과 백지영, 윤도현 등이 출연하게 된 과정이 소개돼 있다.
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출간 기념 북콘서트에서 윤 의원은 "탁현민 감독에게 레드벨벳을 불러야 한다고 '공갈'을 좀 쳤다. 북에서 원하는 것처럼. 왜 그랬냐하면 묘한 장난기 같은 것이 있었다. 북한이니까 빨간, 레드, 어떨까"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탁현민 전 의전비서관은 "게다가 당시 (레드벨벳이) 선곡했던 곡도 <빨간 맛> 이었다"라며 "백지영 씨 같은 경우도 <총맞은 것처럼>을 선곡해서 북이 싫어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2018년 당시 당국자들이 떠올리는 것처럼 이 때의 남북관계는 8년 후인 지금 시점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동적이었다.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과 역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까지, 한반도 평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그해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난 이후에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면서 남북관계는 사실상 차단됐다. 지금 북한은 핵 개발 고도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태다.
현재와 너무나 다른 2018~2019년의 상황을 2026년에 돌아보는 것이 '추억 팔이'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당시의 북한과 미국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 시절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국제 정세를 고려해서도 그렇다. 격동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오히려 트럼프라서 새로운 남북 관계의 전기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국내 정가에 존재한다.
풍계리 없앴는데 미국은 뭐했나
북한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2018년 5월 24일 남한을 비롯한 해외 언론들을 초청해 2009년 2차 핵실험부터 2017년 9월 6차 핵실험까지 진행했던 풍계리 핵실험장의 2번 갱도와 관측소를 폭파했다. 이후 역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그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렸고 양측은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북한의 행동에 대해 미국은 별다른 반대급부를 제공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북한은 이후 남한과 접촉에서 이 부분을 계속 거론했다. 윤 의원은 평양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 전인 2018년 9월 5일 선발대 특사단이 북한에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이 "'동시 행동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은 이미 성의 있는 조치를 취했는데,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윤 의원은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말만 앞세울 뿐, 어떤 호응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면서 한미 연합 군사 훈련도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라며 "미국이 북한 사정을 헤아려봐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를 추진할 동력을 키워줘야 한다. 우리가 동력을 가질 수 있도록 남측이 이해해서 미국 측에 잘 설명해주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밝혔다.
윤 의원에 따르면 북한은 체제 안전 보장, 핵실험 및 장거리탄도미사일(ICBM) 발사 중단에 따른 제재 해제 또는 완화 등을 요구했고, 미국의 '성의있는 조치'가 있다면 미 입회하에 핵시설을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폐기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윤 의원이 비공개로 접촉한 북한 당국자들 역시 지속적으로 이러한 의견을 표출했다. 하지만 미국의 반대급부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로 마무리됐다.
미국은 한반도 평화를 원할까
윤 의원에 따르면 미국 측은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 발표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이라는 표현을 완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평화적 해결'을 공동발표문에 적시할 경우 일종의 대북 군사적 옵션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윤 의원은 "반면 우리로서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문제 해결은 결국 전쟁을 뜻하며, 이는 모두의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문 대통령의 설득이 통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에 동의해 '평화적 해결'이라는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미국의 경직된 모습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이어졌다. 윤 의원은 당시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부부장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간 회동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 "북한의 거부"로 알려져 있지만 속사정은 다르다면서, 개막식 직전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과 탄도 미사일 야욕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펜스 부통령의 발언이 북한을 자극했다고 설명했다.
또 펜스 부통령이 한국에 도착해서 첫 번째 일정으로 천안함 피격 사건의 희생자 가족을 만난 일,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북측 대표단과 같은 열에 앉는 것을 거부한 것 등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취했고, 결국 북한 대표단은 미국과 회동을 취소하게 됐다고 윤 의원은 전했다.
윤 의원은 "문 대통령은 펜스 부통령의 행동이 북한의 행태를 답습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회동 장소까지 준비한 동맹국에 대한 예의 또한 아니라고 했다"며 당시 한국 정부가 북미 고위급 간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2019년 의약품인 타미플루의 대북 지원이 유엔군사령부에 저지됐던 사건도 미국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분위기 구축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주요 대목 중 하나였다.
"2018년 12월 21일, 한미 양국은 워킹그룹 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서 양국은 북한에 대한 타미플루 지원에 합의하고 아울러 철도 연결 착공식, 남북 간 유해 발굴 사업 진행 등도 합의했다. 특히 타미플루 지원에 대해서는 한미 양국이 조금도 이견이 없었다. 의약품이라서 인도적 지원 대상이며, 유엔 대북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2019년 1월 11일, 막상 타미플루를 경의선 육로를 통해 북측에 전달하기로 약속한 날 문제가 생겼다. 유엔군사령부가 타미플루를 실은 트럭의 휴전선(정확히는 군사분계선) 통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타미플루 자체는 의약품으로 인도적 지원이라 대북 제재 품목은 아니지만, 이를 실은 트럭은 제재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우리는 타미플루만 북측에 내려놓고 트럭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설명했지만 유엔군사령부는 듣지 않았다."
이 일로 남북 간 신뢰는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북미 간 협상 분위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평화를 이야기해야
2018년과 너무 다른 2026년의 한반도에서 굳이 책을 내고 북콘서트까지 연 이유에 대해 윤 의원은 "오늘 만큼은 '저 인간들 정말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지금 남북관계는 정말 차가운 겨울과도 같다. 그런데 준비를 해야 기회가 온다. 누군가는 계속 평화 이야기를 하고 남북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느 순간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길 주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자리를 조금 억지스럽게 만든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윤 의원은 "이재명 정부가 평화의 길을 반드시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제 실패하면 정말 당시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북 대결 구도가 고착될 것 같다"라며 "이재명 정부만큼은 반드시 성공해서 '단단한 평화'를 꼭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한 번은 쨍 소리가 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윤 의원의 바람대로 남북관계가 지금과 같은 차가운 긴장에서 단단한 평화로 가려면, 이재명 대통령이 이야기한 대로 남북관계에 '바늘구멍'이라도 내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윤 의원의 이번 저서에 이에 대한 힌트도 있었다. 북한이 진짜 원하는 것, 즉 한미연합훈련과 류경식당 종업원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류경식당 종업원들은 지난 2016년 4월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 있는 북한 류경식당에서 일하다 남한으로 들어왔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탈북자들의 입국 등에 대해 비공개로 하던 전례를 깨고 총선을 닷새 앞둔 4월 8일에 이를 공개해 기획 탈북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윤 의원은 해당 저서에서 류경식당 종업원 탈북 사건에 대해 "북측은 남측 정보기관이 기획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대다수 여성 종업원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탈북인 만큼 하루빨리 북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라며 "특히 해당 여성 종업원의 부모가 기다리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등 여론이 너무 좋지 않다면서, 북한 내부에서 감정이 있는 문제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라고 전했다.
윤 의원은 "북측 관료들은 한미연합훈련과 유경식당 여종업원 탈북 사건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한다. 두 사안은 남북관계 진전에 장애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 발도 나가기 어렵다는 듯이 이야기한다"라며 "북한 최고지도부의 언질이나 지침이 없는 경우 이들 이슈는 매번 걸림돌로 작용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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