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실험미술 선구자 이건용 예술 활동 50주년 기념전 '사유하는 몸'
언어의 한계를 신체 행위로 탐구…"위치·관계 무시하면 원활한 소통 힘들어"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이건용(84)이 백묵을 들고 가로세로 2m 크기의 나무판 위에 섰다. 나무판 가운데에 쭈그리고 앉더니 몸을 컴퍼스처럼 활용해 큰 원을 그렸다.
원 밖으로 나와서는 백묵을 땅에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원 안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 저기"라고 외쳤다. 이어 원 안으로 들어와서는 원 내부를 가리키며 "여기, 여기, 여기"라 말하고, 다시 원을 빠져나와 뒤에 있는 원을 향해 "거기, 거기, 거기"라고 말했다. 이후 원을 따라 밟으며 "어디, 어디, 어디"라고 표현했다.
작가는 5일부터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시작하는 개인전 '사유하는 몸'을 하루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퍼포먼스 '장소의 논리'를 재연했다. 1975년 홍익대학교 운동장에서 선보였던 행위예술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원을 하나 그려 한계를 설정하고는 내 몸을 움직이니 같은 장소라도 내 조건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 것"이라며 "사람도 위치에 따라 관계가 생겨난다. 이를 무시하면 원활한 소통이 힘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이건용은 평생 '언어의 정확성'을 화두로 삼아, 언어의 한계를 신체 행위로 탐구해 왔다. 언어 역시 정확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공유하는 신체의 보편적 행위로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다.
양손의 손가락을 접었다 펴는 간단한 행위로 두 손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거나('손가락의 논리 1'), 팔꿈치를 굽힐 수 없도록 깁스를 한 채 힘겹게 건빵을 먹으며, '팔의 굽힘'이나 '먹기'라는 일상적 행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작업('건빵 먹기')도 있다.
작가는 "지금은 언어학이라는 학문이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런 게 없었다"며 "소통을 위해서는 정확한 언어가 필요한데 완벽하지 않다 보니 이런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혼자서 공부를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며 언어를 세상을 보는 틀로 규정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줄곧 언급하면서 "그가 살아서 내 작품을 봤다면 '내 생각과 맞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는 이건용의 예술 활동 50주년을 기념해 기획됐다. 1970년대 선보였던 퍼포먼스의 기록 영상과 사진, 작업 노트 등을 볼 수 있다. 작업 노트는 그의 퍼포먼스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리한 일종의 설계도다.
작가는 "작업 노트의 지시문에 따라 누가 해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75년 백록화랑에서 열린 '오늘의 방법'전에서 처음 선보였던 '동일면적'과 '실내측정'의 퍼포먼스 기록 영상도 볼 수 있다.
종이를 접고 펴거나 테이프를 자르고 잇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공간과 신체, 오브제 사이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측정하는 작업이다. 1975년에 행해진 그의 퍼포먼스와 이를 진지하게 지켜보는 관람객들의 표정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1970년대 한국 전위예술을 이끌었던 예술단체 'ST'의 창립 멤버로 한국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이벤트'라 명명하고, 신체와 행위가 시간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새롭게 인식될 수 있는지를 탐구해 왔다.
캔버스를 등지거나 옆에 놓고 팔이 닿는 부분까지만 붓질하며 신체 한계를 지각하는 '바디스케이프' 연작이 대표적이다.
이날 작가는 퍼포먼스 후 "가능한 정확한 원을 긋고 싶었는데 잘 안되고 삐뚤어졌다. 하지만 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두가 공감할 것"이라며 "늙어서 손가락이 떨리지만 이럴 때 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건강하든 노쇠하든 어떤 경우라도 몸을 갖고 있고 움직일 수 있으니 그게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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