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종우 선임기자 = 달러는 그동안 '신뢰의 화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1944년 출범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은 세계와 약속했다. 그것은 금 1온스를 35달러에 바꿔주겠다는 약정이었다. 달러는 '금의 교환증서'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전쟁으로 허물어진 국제질서에는 안정적인 결제 수단이 필요했고, 미국은 막대한 금 보유고와 생산력으로 달러에 대한 신뢰를 떠받쳤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이유는 힘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다.
기축통화의 위상은 미국에 전례 없는 특권을 안겨주었다. 무역적자를 내도 자국 통화로 결제할 수 있었고, 국채를 발행하면 세계 각국에서 사주었다. 이른바 '달러의 과도한 특권'이다. 세계는 원유와 원자재, 금융 거래를 위해 달러를 비축했고, 미국은 그 수요 위에서 팽창을 거듭했다. 문제는 이 특권이 달콤하지만 쓰디쓴 '유혹'이었다는 점이다. 달러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그 신뢰를 지키기 위해 감수해야 할 제약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신뢰는 자산이 아니라 비용으로 여겨졌다.
1971년 마침내 미국은 약속을 저버렸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무역 적자를 끝내 감내하지 못하고 금태환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약속은 깨졌지만, 달러는 살아남았다. 달러를 대체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달러를 떠받치던 토대는 금이 아니라 미국의 군사력과 금융력, 그리고 강력한 제재 권한으로 바뀌었다. '신뢰의 화폐'에서 '패권의 화폐'로 어의(語義)가 달라진 것이다. 달러는 더 이상 중립적 교환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달러는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트럼프가 "달러 약세라도 괜찮다"라고 언급하자마자, 달러인덱스는 2022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동안 미국 재무당국이 지켜온 '강(强) 달러' 원칙은 달러 가치를 공공재로 다루겠다는 암묵적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장은 달러 가치가 정책의 일관성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불길한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투자자들은 금 같은 대체 자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에서 선명하게 체감된다. 달러인덱스는 떨어졌지만,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올랐다. 달러의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자, 자금의 흐름은 한국을 회피하고 있다. 핵심은 달러의 강약이 아니다. 달러가 더 이상 안정적인 기준점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달러가 그 역할을 잃는다면, 그 충격은 주변부 국가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달러의 배신은 미국이 선택한 것이지만, 그 비용 부담은 달러를 믿고 살아온 나라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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