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도시는 기억 위에 세워진다. 빌딩이 솟고 도로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종종 그 기억을 지워가며 발전이라 부른다. 그런 점에서 한양의 수도성곽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의 심장이었던 한양을 둘러싼 이 거대한 방어 체계는 군사 유산을 넘어, 수도라는 공간이 어떻게 지켜지고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서다. 그리고 이제 그 역사가 세계의 언어로 번역될 준비를 마쳤다.
국가유산청이 ‘한양의 수도성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은 행정 절차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이는 한 나라의 수도가 스스로를 어떻게 방어했고, 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질서를 유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체계 전체가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 관문에 들어섰음을 뜻한다. 성곽 몇 구간의 보존이 아니라, ‘수도를 지키는 시스템’ 자체가 평가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은 더욱 크다.
한양의 수도성곽은 하나의 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행정과 왕권의 중심을 보호한 한양도성, 유사시 군사적 최후 방어선이 된 북한산성, 그리고 장기전에 대비해 인구와 물자를 보호하는 연결 방어선 탕춘대성까지. 이 세 성곽은 각기 다른 목적을 지녔지만 하나의 전략 아래 유기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이는 성곽을 ‘벽’이 아닌, 수도 운영을 위한 복합 인프라로 이해한 조선의 국가 운영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방어 체계가 왕궁이나 지배층만을 보호하기 위한 구조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눈 여겨봐야 한다. 한양의 수도성곽은 전쟁 시 수도 인구 전체를 입보성으로 이동시켜 장기전에 대비하는 구체적인 전략을 전제로 한다. 이는 도시 구성원 전체를 국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자 자산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방어의 초점이 권력에 머문 것이 아니라 도시 공동체 전반으로 확장돼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의 통치 이념을 공간 구조로 구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동시대 다른 지역을 돌아보면 이 가치가 더욱 또렷해진다. 세계 여러 고도들이 산업화와 도시 확장 속에서 성곽을 허물고 흔적만 남긴 것과 달리, 한양의 수도성곽은 여전히 도시의 지형과 일상 속에 살아 있다. 성곽 길을 따라 걷는 시민들, 성벽 아래 형성된 마을, 산성과 도성을 잇는 능선 위 풍경은 과거와 현재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속성은 물리적 보존을 넘어, 기억의 지속이라는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한양의 수도성곽이 지닌 또 하나의 의미는 동북아시아 성곽 축성 전통의 창의적 계승이라는 점이다. 산의 능선을 활용한 포곡식 성곽 구조는 자연 지형을 방어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동아시아 특유의 방식이다. 그러나 한양의 경우, 이를 단일 산성이 아니라 수도 전체를 아우르는 다층적 방어 체계로 확장했다. 전통 위에 새로운 국가 전략을 더한, 도시 규모의 진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18세기 이후 이 체계는 더욱 정교해졌다. 외침의 가능성이 상존하던 시대, 조선은 수도를 왕이 거주하는 공간을 넘어 국가 존립의 상징이자 행정·경제·문화의 집결지로 인식했다. 수도가 무너지면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성곽은 물리적 방어선이자 국가 체제의 최후 버팀목이 되었다. 한양의 수도성곽은 이 역사적 긴장감이 오랜 시간 축적된 결과물이다.
문화적으로도 성곽은 도시 풍경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한양도성의 성문은 출입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삶의 리듬을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했고, 성벽은 도시의 경계를 설정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이동과 기억의 방향을 결정했다.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평소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경관을 이루다가, 위기 시에는 생존의 공간으로 성격을 바꾸는 이중적 장소였다. 이러한 다층적 의미는 성곽을 유적이 아닌 ‘문화 경관’으로 바라보게 한다.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이런 복합적 가치를 국제사회와 공유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미 예비평가를 통과했다는 사실은, 한양의 수도성곽이 지닌 보편적 가치가 일정 수준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본격적인 평가 과정은 이 유산이 한국을 넘어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역사적 모델임을 입증해가는 시간이 될 전망이다.
세계유산 등재 이후에는 보존과 활용 사이의 균형이라는 더 까다로운 과제가 기다린다. 성곽이 박제된 유산으로 머무르지 않고 시민의 삶과 호흡하는 공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개발과 관광, 지역 공동체의 일상이 조화를 이루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한양의 수도성곽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금도 도시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다.
결국 한양의 수도성곽은 돌로 쌓은 구조물이 아니라, 한 시대 사람들이 수도를 이해한 방식이자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의지의 집합체다. 이 거대한 방어망 속에는 전쟁의 공포, 백성을 향한 책임, 자연과 지형을 읽어낸 지혜가 함께 스며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향한 여정은 그 의미를 국제 무대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우리가 우리 도시의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이어갈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