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무부가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간)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수사 관련 문건 수백만건을 공개하면서 거센 후폭풍이 일고 있다.
엡스타인은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본인이 소유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의 '리틀세인트제임스' 섬으로 유력인사들을 초대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도록 알선했는데 이 문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빌 게이츠 등 사회 각계 유력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어서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불법행위나 비위를 저지른 적이 없고 엡스타인의 성범죄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파장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클린턴, 빌 게이츠 등 정계·재계·학계 망라
로이터통신은 2일 '엡스타인 파일'에서 엡스타인과의 친분관계가 드러난 정계, 금융계, 학계, 재계 등의 유력 인사들을 소개했다.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엡스타인과 자주 어울렸다. 잡지 인터뷰에서 엡스타인의 여성 취향에 대해 "어린 편인" 여성을 좋아한다고 설명한 것으로 보도됐다.
미국 법무부가 공개한 문서에는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여러 여성과 트럼프가 함께 찍힌 사진과, 엡스타인의 50세 생일 때 만들어진 이른바 '엡스타인 생일책'에 트럼프가 서명한 것으로 보이는 '외설 편지'가 포함돼 있다.
엡스타인은 한 이메일에서 트럼프가 "그 여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썼으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2000년대 초에 엡스타인과 어울리면서 그의 전용기를 몇 차례 이용했다. 법무부가 공개한 사진에는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여성들과 함께 수영하거나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담겼다.
앤드루 마운트배튼-윈저(옛 이름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는 엡스타인과 사교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며 이와 관련된 성매매 의혹을 계기로 최근 작위와 칭호를 삭탈당하고 폐서인돼 궁 밖으로 쫓겨났다.
법무부 자료에는 그가 여성들과 함께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이 포함돼 있다. 그 중 한 장은 그가 한 여성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다른 한 장은 여러 여성들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나와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2012년 엡스타인의 별장이 있는 섬을 방문해 오찬을 함께했으며 2015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대선 경선후보의 모금 행사에 엡스타인을 초대했다는 내용이 이메일로 드러났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는 엡스타인이 징역을 살고 출소한 후 자선 활동 확대를 논의하기 위해 여러 차례 만난 것으로 드러났다. 엡스타인 파일에는 게이츠가 얼굴이 삭제된 여성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사진이 포함돼 있다.
엡스타인이 자신에게 보낸 것으로 보이는 한 이메일에는 게이츠가 러시아 여성들과의 관계 이후 성병에 걸린 뒤 당시 배우자였던 멀린다에게 이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는 미확인 내용이 담겼다.
게이츠가 엡스타인에게 항생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고, 성병 증상을 엡스타인에게 설명한 뒤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게이츠의 대변인은 "터무니없고, 완전히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그는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엡스타인이 게이츠와의 관계가 끝난 데 대해 좌절했고, 게이츠를 함정에 빠뜨리고 명예를 훼손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터 맨덜슨 전 영국 산업부 장관은 엡스타인 파일에 5천번 이상 이름이 나왔다. 엡스타인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르면서 조기 석방을 신청하라고 조언한 이메일이 작년에 공개되면서 주미 영국 대사직에서 해임됐다.
트럼프 "엡스타인과 친분 없어…몇몇 급진좌파엔 소송할 것"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과 친분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엡스타인과 관련해 자신에게 불리한 발언을 한 인사들에게 소송을 걸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2일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나는 엡스타인과 친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법무부에 의해 방금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엡스타인과 마이클 울프라는 부도덕한 거짓말쟁이 작가는 나 또는 내 대통령직을 훼손하기 위해 공모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게시글에서 "급진 좌파들의 헛된 희망은 여기까지"라며 "그들 중 몇몇 사람에게는 소송을 걸겠다"라고도 밝혔다.
이어 "게다가, 쓰레기 같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과 달리 나는 더러움이 들끓는 엡스타인의 섬에 가본 적이 없지만, 거의 모든 부패한 민주당원과 그들의 후원자들은 갔었다"고 주장했다.
클린턴, 엡스타인 관련 하원 출두…전직 대통령 의회 증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는 엡스타인 파일과 관련해 하원 감독위원회 조사에서 출석한다.
앞서 감독위는 클린턴 부부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으나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클린턴 부부는 소환장이 무효이며 감독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적들을 표적으로 삼으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일부 민주당 의원들도 클린턴 부부를 형사 모독죄로 기소할 것을 권고하는 데 찬성표를 던지자 결국 출석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엡스타인 사건 수사로 의회에서 증언하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NYT는 전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19년 감옥에서 사망한 엡스타인과 알고 지냈지만 엡스타인의 개인 섬을 방문한 적은 없으며 20년 전에 그와 연락을 끊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행 기록에 따르면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2년과 2003년 엡스타인의 개인 제트기를 이용해 네 차례 해외여행을 했다.
'엡스타인 문건' 영국 前장관, 상원의원 사임
엡스타인과 연루된 피터 맨덜슨 전 영국 산업장관은 상원의원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마이클 포사이스 영국 상원의장은 3일 상원에서 "오늘 상원 사무처장이 맨덜슨 경으로부터 공공의 이익과 상원의 편의를 위해 2월4일자로 상원의원에서 사퇴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통지받았음을 상원에 알린다"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주요 부처 장관을 지낸 맨덜슨은 과거 엡스타인과 깊은 친분을 맺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 키어 스타머 정부의 미국 주재 대사로 재임하던 중 경질됐다.
맨덜슨은 엡스타인으로부터 2000년대 초반 7만5천달러(약 1억원)를 송금받은 것으로 의심된다. 이런 의혹이 일자 맨덜슨은 지난 1일 송금에 대해선 전혀 모르겠다면서도 노동당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탈당했다.
그러나 2일 그가 산업장관 시절 고든 브라운 정부의 금융위기 대응 경제정책안이 담긴 이메일을 엡스타인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등 정보를 유출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상원에서도 물러나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맨덜슨은 1992∼2004년 하원의원을 지냈고 2008년 내각에 다시 기용될 때 남작 작위를 받아 종신 귀족이 되면서 상원의원이 됐다.
의회 도서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상원개편법에 따라 종신 귀족이 상원에서 사퇴하는 것은 가능해졌지만, 작위 자체는 포기할 수 없고 입법 절차에 따라 박탈하는 것만 가능하다.
종신 귀족 지위가 입법 절차에 따라 박탈된 마지막 사례는 1차 세계대전 시기인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반역자를 상원에서 제거하기 위해 제정된 작위박탈법에 따라 최소 4명이 작위를 잃었다.
총리실은 맨덜슨의 작위 박탈에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법안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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