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슬픈 동안(東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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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시인의 얼굴] 슬픈 동안(東岸)

독서신문 2026-02-03 06:48:00 신고

3줄요약

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개구리알에서 방금 깨어난 올챙이들이

논 봇도랑을 타고 노는 걸 보면 봄이다

언 땅을 치켜세운 생열귀에 싹이 돋고

어느새 딱따구리와 도마뱀도 깨어난다

푸르던 나의 봄은 어디 가고

그토록 기다리던 늦둥이는 무산되고

하혈한 나무는 몸 추스릴 사이도 없이

월경은 매달 반갑지 않은 빚쟁이처럼 찾아와 진을 쳤고

뱀의 찔레꽃 숲에서 하얀 가시를 자처했다

생열귀나무도 어느덧 중년에 들어서서일까

부엉이 눈동자 같은 몇 개의 목류를 몸에 지녔다

쟁반 같은 보름달이 떠도 소용없는 일

온몸으로 꽃 지는 일을 받아들이며

그래도 꽃그늘 아래를 서성이고 있다

-이애리, 「생열귀나무」

 

슬픈 동안(東岸)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는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저작물입니다. 브라질 열대 우림 원주민 부족에 대해 조사한 기행물입니다. 오지 탐사하는 것일 텐데, 언뜻 종편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식 기록은 아닐까요. 그런데 왜 열대지역을 조사 연구하며 ‘슬픈’이란 말을 붙였을까요. 제목에 이끌려 책장을 열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문명 밖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시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제목만 남은 책입니다. 원시의 삶을 미개하게 여겨 측은하게 여긴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여기는 시각이 어처구니없이 슬프다는 뜻입니다. ‘타자 연구’가 아니라 문명·야만·자연·인간 존재 전체를 되묻는 철학적 텍스트입니다.

이애리의 시를 읽으며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봅니다. 그가 사는 강원도는 특히 태백산 너머 저쪽은 관동별곡에나 나오는 명승지에 불과하지요. 풍경만이 있을 뿐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 우주공간처럼 여기지요.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시집 무릉별유천지 사람들 여기저기에 인간 삶의 현실을 심어 놓았습니다. 시 「생열귀나무」도 온몸으로 피고 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생열귀나무’는 강원도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토속 장미 같네요. 시적 주체는 ‘달 동물(lunar animal)’입니다. 달처럼 차오름과 이을음을 반복합니다. 봄이 왔는데 뜻은 무산되고 ‘하얀 가시’로 자기를 찌르고 소용없다 좌절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그늘을 벗어 던질 요량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강원도 저쪽, 태백산 너머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은 슬픕니다. 문명인을 자처하는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대하나요. 광장을 떠나 산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손가락질하나요. 슬픈 건 영속과 소멸을 반복하는 저 달이 아닙니다. 슬픈 건 기다림에 지쳐 하릴없이 서성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슬픈 건 저 달의 이면이 있다는 걸 존중하지 않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많은 이야기가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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