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김치와 아리랑, 사무라이에 캥거루, 판다까지. 글로벌 채권시장에는 유독 이름이 붙은 채권이 많다.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이 채권들이 만들어진 자본의 논리는 하나로 수렴된다. 돈은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찾아 움직이고, 시장은 그 경로에 이름을 붙여 기록해 왔다. 이른바 ‘국적 채권’의 별명은 발행사가 선택한 조달 전략을 압축한 결과물인 셈이다.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고금리 기조의 장기화와 환율 변동성 확대, 지정학적 리스크가 겹친 최근 시장 환경에서 국적 채권(이국 채권)이 기업 재무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자금 조달의 성패가 단순한 금리 수준보다 어디서, 어떤 통화로, 누구에게 빌리느냐에 의해 갈리는 국면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김치본드 발행이 15년 만에 재개되면서 국내 외화 유동성 개선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조달 지형도 : 금리·통화·투자자가 만드는 무형의 지도
국적 채권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조달의 지형도’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하나로 연결돼 있지만, 실제 조달 환경은 국가별 금리 수준, 통화의 성격, 투자자 구성에 따라 뚜렷하게 분절돼 있다. 발행사는 이 분절된 지형 위에서 가장 비용 효율적인 경로를 선택한다.
일본은 초저금리와 장기 자금을 선호하는 기관투자자 풀이 결합된 시장이다. 이곳에서 엔화로 발행되면 ‘사무라이본드’가 된다. 호주는 연기금과 보험사를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기관 수요가 특징으로, 호주달러로 발행된 외국계 채권은 ‘캥거루본드’로 불린다. 중국 본토에서 위안화로 발행되는 ‘판다본드’는 조달 수단이면서 동시에 통화 국제화라는 정책적 맥락을 함께 띤다.
이처럼 채권의 이름은 발행 주체의 국적이 아니라, 조달이 이뤄진 시장의 성격과 통화 선택을 드러낸다. 어느 통화가 상대적으로 저렴한지, 어느 투자자가 장기 보유 성향을 보이는지, 어떤 규제 환경이 발행을 허용하는지에 따라 조달 경로는 달라지고, 시장은 그 경로에 이름을 붙여왔다. 재미있는 이름이 글로벌 자본이 이동하는 길 위에 붙은 이정표가 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이중 구조: ‘김치·아리랑’ vs ‘판다·딤섬’
조달의 지형도에서 한국과 중국은 예외적으로 이중 네이밍 구조를 갖는다. 다만 기준은 서로 다르다. 한국은 같은 온쇼어 시장에서 발행되더라도 통화에 따라 이름이 갈리기 때문이다.
아리랑본드는 외국계(비거주자)가 한국에서 원화(KRW)로 발행한 채권이다. 1995년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최초 발행한 이후, 한국의 원화 투자자 풀을 직접 겨냥하며 국내 금리 곡선과 통화 정책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발전해 왔다. 시장 규모는 김치본드에 비해 작지만, 원화 국제화 측면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반면 김치본드는 한국 시장에서 발행되지만 외화(주로 달러)로 표시된 채권이다. 한국을 플랫폼 삼아 외화를 조달하는 구조로, 환율 변동성은 통화스왑과 환헤지를 통해 관리한다. 핵심은 ‘원화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한국 시장이 보유한 외화 유동성과 수급 구조를 활용하는 데 있다. 2025년 한국은행의 김치본드 투자 제한 해제로 15년 만에 기업 발행이 재개되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같은 국내 발행이지만, 아리랑은 원화 베팅, 김치는 외화 조달 전략이다. 같은 온쇼어 시장 안에서 통화 선택에 따라 이름이 갈라진 사례는 글로벌 채권시장에서도 상대적으로 드물다. 이는 한국이 원화 시장이면서 동시에 외화 조달 허브로 기능해왔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반대로 통화는 같고 시장 위치가 다르다. 판다본드는 외국계 발행사가 중국 본토(온쇼어)에서 발행하는 위안화 채권이고, 딤섬본드는 홍콩 등 중국 역외(오프쇼어) 시장에서 발행되는 위안화 채권이다. 즉 한국은 통화에 따라, 중국은 시장 위치에 따라 이름이 갈린다. 국적 채권의 별명은 각국 자본시장이 무엇을 핵심 전략 변수로 삼고 있는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금리보다 ‘경로’...“스왑 비용과 헤지 구조로 리스크 관리해야”
최근에는 김치본드가 다시 등장하며 주목받고 있다. 달러 강세와 환율 변동성이 상수가 된 환경에서, 기업들이 외화 조달 방식을 다각화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현물환 시장에서 직접 달러를 조달하는 방식은 비용과 타이밍 관리 측면에서 부담이 커졌고, 이에 따라 채권 발행을 통한 외화 조달이 다시 선택지로 떠올랐다.
2025년 기준 한국계 외화채권(KP) 발행 규모는 연간 500~600억 달러 수준으로 최근 5년 내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해 만기 도래 KP는 약 525억 달러로 전년 대비 23% 증가했다. 일부 금융사는 김치본드를 통해 해외 시장에서 발행하는 글로벌본드 대비 10~15bp가량 조달 비용을 절감하기도 했다. 이는 개별 발행사가 조달의 지형도 위에서 선택한 최적 경로로 해석된다.
다만 김치본드는 금리만 보고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조달 이후 통화스왑과 환헤지를 통해 외화 부채를 관리하지 않으면, 만기 시 환율 변동이 곧바로 상환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에 국적 채권의 성패는 발행 순간이 아니라, 조달 이후의 관리 능력에서 갈린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석병훈 교수는 “김치본드처럼 국적이 붙은 채권은 결국 외화 조달 경로의 선택을 드러내는 라벨”이라며 “발행이 성사됐다는 사실은 투자자들이 발행사의 신용을 가격에 반영했다는 신호에 가깝다”고 말했다. 다만 “이를 한국 자본시장 전반의 위상 변화로 확대 해석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서울 소재 대학 한 경제학과 교수도 “국적 채권은 유행이 아니라 비용·환율·규제 조건을 동시에 계산한 결과물”이라며 “표면 금리만 보고 판단할 경우 스왑 비용과 헤지 구조를 간과하기 쉽고, 이는 오히려 리스크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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