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이 환경 속에서 작업해온 작가로 Hiroshi Nagai를 떠올릴 수 있다. 나가이의 그림에는 해변, 수영장, 고속도로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있어도 중심이 되지 않는다. 그의 이미지는 특정 사건을 말하지 않지만, 일정한 시간대와 공기를 공유한다. 상업 일러스트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점차 ‘어디에 쓰였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만들어내는가’로 읽히게 되었다. 반복되는 장면이 쌓이며 하나의 정서적 세계가 형성되고, 그 세계는 회화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와 다른 방향에서 흥미로운 예가 KYNE이다. KYNE의 그림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있다. 표정은 절제되어 있고, 감정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 인물은 어떤 서사의 주체라기보다 하나의 상태로 화면에 존재한다. 만화적인 선과 평면적인 색면은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인식하게 하지만, 동시에 해석을 멈추게 만든다. 그의 작업은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지만,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그의 그림은 설명을 전제로 한 일러스트와 분명히 다른 위치에 놓인다.
나가이 히로시와 KYNE를 함께 보면 두 작가는 모두 일러스트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회화의 영역과 접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가이는 장면과 분위기를 통해 시간의 감각을 구축하고, KYNE는 인물과 정서를 반복하며 세계를 고정한다. 공통적인 점은 이 이미지들이 더 이상 외부의 텍스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스스로 닫힌 구조를 가지며, 관객은 그 안에서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머무르게 된다.
결국 지금 회화와 일러스트의 관계를 다시 묻는 일은 장르를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흐려진 경계가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에 가깝다. 회화가 장면을 끌어오고 일러스트가 자율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이 지점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어디에서 출발했는가보다 어떤 밀도로 지속되는가로 평가된다.
이 흐름은 일본이라는 환경에서 특히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과연 이 조건은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와 회화가 같은 장면 위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만드는 지금, 우리는 이미지를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다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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