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교과서 미술 Ⓘ 17p 수록
작가: 마츠에다 유키(松枝悠希/일본/1980~)
작품명: 여기가 비상구(탈출)
재료: 아크릴, 나무, LED, 페트
작품크기: 50×32×26㎝
제작년도: 2018년
[문화매거진=최여민 작가] 인간의 DNA에는 위기를 감지하면 도망치라는 명령이 새겨져 있다. 들판에서 사자를 마주했을 때야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의 나는 출근해서 상사를 마주할 때도 그 본능이 작동한다. 나는 남들보다 위협을 더 빠르고 강하게 감지하는 편이고, 그래서 나에게 어렵고 낯선 것들은 하나같이 사자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 탓에 성을 따 ‘최안전우선’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나는 웬만하면 위험한 것들과 미리 거리를 둔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면 두려움은 더 커진다. 도망치고 싶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최악의 순간을 대비한 에어백 하나쯤은 존재한다. 나라와 문화를 넘어, 단어와 문자를 몰라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픽토그램 덕분이다. 픽토그램은 ‘그림(picture)’과 ‘전보(telegram)’를 합친 말로, 말이나 글 없이도 의미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시각적 기호다. 설명할 틈조차 없는 위기의 순간, 우리는 장황한 문장보다 먼저 이 작은 그림들을 찾게 된다.
마츠에다 유키의 ‘여기가 비상구(탈출)’는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익숙해진 비상구 표지를 그대로 작품으로 옮긴 설치 작업이다. 지하철이나 영화관, 건물 안에서 무심코 지나치던 안내판을 실제 크기의 입체 구조물로 재현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누구나 즉시 알아볼 수 있는 픽토그램을 가져와, 관람자가 설명을 읽기도 전에 먼저 이해하게 만든다.
작품은 아크릴, 나무, LED, 페트 등 실제 공공장소 안내판에 사용되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원래는 벽에 붙어 있어야 할 비상구 표지가 입체 구조물로 서 있는 순간, 너무도 익숙한 기호는 갑자기 낯선 존재로 변한다. 그렇다고 이 낯섦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관람자는 먼저 “아, 비상구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곧이어 “그런데 왜 여기에 있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LED 조명은 실제 비상구처럼 또렷하게 빛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가볍고 재미있다. 이 표지는 비상구와 작품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관람자로 하여금 감상보다 탈출이라는 기능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안내판 이미지를 평면이 아닌 입체로 만들어 익숙한 기호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한다. 여러 시리즈 가운데 ‘여기가 비상구(탈출)’에서는 여기에 패러디 요소가 더해진다. 액자 아래로 이미지가 잘려 내려오는 형상은 경매장에서 작품이 파쇄되며 화제가 되었던 뱅크시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 제도의 관습을 비틀기 위한 강렬한 퍼포먼스는 비상구 픽토그램과 만나 전혀 다른 맥락을 만든다. 파쇄된 작품은 탈출을 알리는 기호로 바뀌고, 관람자는 익숙한 사건을 떠올리며 작품의 위트에 슬쩍 웃음을 짓게 된다. 그렇게 잘 알려진 예술사의 한 장면과 일상적인 안내 표지가 겹쳐지며, 예술과 일상의 경계는 한층 더 흐려진다.
이 비상구는 실제로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위급한 순간, 밝게 빛나는 표지판만을 의지해도 된다고 아무 의심 없이 믿어 왔다. 그러나 이 작품 앞에서는 그 믿음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다. 초록색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힘차게 튀어나와 도망치고 있지만, 그가 도착할 목적지는 없다. 이 비상구는 출구가 되지 못하는 대신, 위기 앞에서뿐 아니라 평온한 일상에서도 습관처럼 출구를 찾던 나의 발걸음을 되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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