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검이불루,화이불치', 시대 관통 미학 키워드
김건희 비위 꾸짖으면서 '취임 전 명품백'에 무죄
"차라리 AI판사를", 냉정하되 상식 기반한 판결을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백제 온조왕이 지은 새 궁궐을 일컬어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고 기록했다. 이 짧은 여덟 글자는 절제 속의 품격, 과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 미감(美感)의 정수로 꼽힌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삼봉 정도전도 경복궁 창건 때 이 미학을 소환했다. 그는 태조에게 "궁궐이 사치스러우면 반드시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정을 축내지만, 누추하면 조정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면서 '검이불루'야말로 통치 공간이 갖춰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간언했다.
한민족의 수천 년 미학을 반추해 보면, 경복궁 같은 웅장한 건축물은 물론 사찰의 석탑과 고려청자 같은 공예품, 정갈한 전통 가구에 이르기까지 '검이불루'가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이 말은 예술적 경지를 넘어 공직자의 자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벼슬이 높아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권한이 커도 이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절제야말로 공인의 품격을 가늠하는 기준이라는 훈계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와 공인의 모습 곳곳에 '검이불루'의 정신이 깊이 배어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김건희 특검 사건 1심 재판 선고에서 '검이불루'가 인용됐다. 재판장은 "굳이 값비싼 재물로 두르지 않아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며 명품 수수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영부인의 행태를 꾸짖었다. 일견 판사의 통찰이 빛나는 듯 보이나, 판결의 실체를 마주하면 과연 그 여덟 글자의 진의가 사법 정의로 온전히 구현되었는지 깊은 의문이 남는다.
재판부는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22년 4월, 통일교 관계자로부터 받은 고가의 샤넬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영부인 내정자'에 대한 의례적 표시이자 구체적 청탁이 없었다는 논리다. 하지만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란 없다. 생면부지의 인물이 건네는 명품백에 어떤 의도가 담겼는지는 삼척동자도 알 법한 일이다. 이러한 판단은 '김영란법'의 근간을 무너트리고 권력자 주변을 향한 '사전 로비'를 정당화하는 전례가 될 수 있다.
국민이 사법부에 기대하는 것은 화려한 수사(修辭)를 곁들인 훈계가 아니다. 절대 권력의 단맛에 취해 탐욕을 부린 자에 대한 엄중하고 객관적인 법의 잣대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학력 수준이 높은 우리 국민이 왜 박수 대신 "차라리 AI 판사를 도입하자"는 냉소를 보내는지 법원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법복 속 깊숙이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게 아닌지 말이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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