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이 전시를 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면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일 것이다. 위그 역시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이 얽힌 환경을 작업으로 만들어왔다. 그의 전시에서는 생명체, 알고리즘, 환경 조건이 서로 영향을 주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관객은 작품을 이해하기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지켜보게 된다. 로하스의 작업도 이와 비슷하게, 통제보다는 공존에 가까운 감각을 만든다.
또 다른 연결선으로는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를 떠올릴 수 있다. 사라세노는 공기, 진동, 거미줄 같은 비가시적인 요소를 통해 인간 중심적 사고를 확장해왔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보지 못하던 관계망을 드러내며, 세계를 다른 좌표로 인식하게 만든다. 로하스와 사라세노 모두, 예술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온 세계의 구조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감각을 조용히 남긴다.
이 작가들에게 공통적인 점은 관객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기존의 이해 방식이 잘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설명이 늦어지고, 판단이 미뤄지는 그 시간 속에서 관객은 스스로 감각을 조정하게 된다. 이 전시가 종종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불친절함은 관객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너무 빠른 이해를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전시를 보는 동안 가장 강하게 남은 인상은 혼란보다는 방향 감각의 상실이었다. 어디가 중심인지, 무엇을 먼저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상태가 이상하게도 오래 유지되었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자, 공간과 재료, 냄새와 온도가 먼저 다가왔다. 그때서야 이 전시가 요구하는 태도가 분명해졌다.
우리는 언제부터 모든 것을 빠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설명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전시는 이런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는다. 다만, 설명이 붙기 전의 세계를 그대로 놓아둔다.
그래서 이 전시는 미래를 예언하는 전시라기보다 현재를 늦추는 전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세계를 너무 빨리 정리하지 않기 위해, 너무 쉽게 이름 붙이지 않기 위해. 전시장을 나설 때 남는 것은 명확한 의미가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감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감각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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