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도파민의 시대, ‘조림’의 미학으로 응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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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 도파민의 시대, ‘조림’의 미학으로 응답하다

이슈메이커 2026-01-29 09:41: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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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도파민의 시대, ‘조림’의 미학으로 응답하다

세상은 더 빠르고, 더 자극적인 걸 원한다. 15초짜리 숏폼 영상이 뇌를 지배하고, 혀끝을 강타하는 ‘마라’ 맛이 미식을 대변하는 시대.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는 그 도파민의 정점에서 시작됐다. 화려한 불쇼와 분자 요리의 향연, 그리고 계급을 뒤집으려는 ‘흑수저’들의 거친 도발이 이어졌다. 하지만 가장 높은 곳에 깃발을 꽂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느리고, 가장 조용한 요리사 최강록이었다.

 

ⓒ넷플릭스
ⓒ넷플릭스

 

‘척’하며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고백
“조림을 잘 못하지만 잘하는 척했습니다. 척하며 살아온 인생이 좀 있었습니다.”


  우승 직후 터져 나온 그의 소감은 승자의 포효가 아닌, 덤덤한 자기 고백이었다. ‘조림의 왕’, ‘연쇄조림마’, ‘조림핑’ 등 대중은 그에게 수많은 별명을 붙이며 열광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 수식어가 버거웠다고 했다. 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보고 뒤늦게 요리에 뛰어들어,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일본 유학을 떠났던 비전공자의 콤플렉스. 그는 “사람들이 일본에서 배워왔냐고 물으면, 그때부터 잘 아는 척, 많이 배운 척하며 살았다”고 털어놨다.


  그 가면을 벗기 위해 최강록은 다시 전쟁터로 걸어 들어왔다. 2024년 방영된 시즌1에서의 탈락은 그에게 ‘불완전 연소’로 남았다. 제작진은 그에게 “이번엔 불쏘시개가 아니라 땔감이 되어 완전히 연소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기꺼이 자신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시즌2의 ‘히든 백수저’로 등장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순간, 그는 이미 내려갈 곳 없는 높은 곳에 서 있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책임감을 짊어졌다.


  최강록의 무기는 여전히 ‘시간’이었다. 제한 시간 180분 동안 무제한으로 음식을 내야 하는 ‘무한 요리 천국’ 미션에서, 그는 단 하나의 요리 ‘무지스시(찐초밥)’에 집중했다. 재료 하나하나를 따로 조리고 찌는 지난한 과정. 화려한 퍼포먼스는 없었지만, 시간과 온도가 만들어낸 깊이는 심사위원들의 혀를 사로잡았다. 그는 “요리는 결국 ‘TT(Time & Temperature) 관리’일 뿐, 특별한 것은 없다”며 자신을 낮췄지만, 그 건조한 숫자 뒤에는 재료의 본질이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의 시간이 있었다.

 

‘흑백요리사 시즌2’는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비영어 쇼 1위를 차지하며 많은 화제를 모았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즌2’는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비영어 쇼 1위를 차지하며 많은 화제를 모았다. ⓒ넷플릭스

 

깨두부와 빨간 뚜껑 소주, ‘노동자’로서의 요리사
결승전 주제 ‘나를 위한 요리’에서 최강록은 자신의 시그니처인 조림을 버리고 대신 ‘깨두부 국물 요리’를 택했다. 깨두부는 주방에 갓 들어온 막내들이 근성을 테스트받기 위해 만드는, 요리사의 가장 밑바닥 노동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최강록은 "나이가 드니까 팔이 아파서 안 하게 되더라"라면서도 “게을러지지 말자.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점검하자는 생각으로 또다시 냄비 앞에 섰다”고 밝혔다. 그가 내놓은 요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중년에 접어든 요리사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다시 한번 자신을 조이겠다는 ‘자기 점검’의 선언이었다. 함께 곁들인 알코올 도수 20.1도의 빨간 뚜껑 소주는 그 선언에 찍은 마침표였다. 하루 종일 불 앞 사투를 벌이고, 땀에 젖은 작업복을 입은 채 털어 넣는 독한 소주 한 잔의 위로. 그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스타 셰프가 아닌,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노동자’로서의 요리사이고자 했다. 최강록은 끓어오르는 시대에 뭉근하게 스며드는 ‘조림’의 미학으로 대중에게 묵직한 울림을 던졌다.

 

결승전 주제 ‘나를 위한 요리’에서 최강록은 자신의 시그니처인 조림을 버리고 대신 ‘깨두부 국물 요리’를 택했다. ⓒ넷플릭스
결승전 주제 ‘나를 위한 요리’에서 최강록은 자신의 시그니처인 조림을 버리고 대신 ‘깨두부 국물 요리’를 택했다. ⓒ넷플릭스


  안성재 심사위원이 그릇째 들고 국물을 마시게 만들고, 백종원 심사위원까지 만장일치로 그를 선택하게 만든 힘은 기교가 아니었다. 진심이 담긴 ‘맛의 서사’였다. 그는 그렇게 ‘조림하는 요리사’라는 가면을 스스로 깨부수고, 인간 최강록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처럼 최강록은 조용한 승부사였다. 어눌한 말투 뒤에 늘 비수(匕首)가 숨어 있었다. 그는 재료의 물성을 넘어 판의 흐름과 심사위원의 심리까지 읽어냈다. 특히 “나야, 들기름”과 같은 한마디로 전세를 뒤집는 파격은 요리가 단순한 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을 설계하는 고도의 전략임을 입증했다.

 

‘흑백요리사’ 시리즈의 성공 이후, 그 인기는 화면 바깥으로도 이어져 출연 셰프들의 식당은 예약과 웨이팅 대란인 것으로 전해진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리즈의 성공 이후, 그 인기는 화면 바깥으로도 이어져 출연 셰프들의 식당은 예약과 웨이팅 대란인 것으로 전해진다. ⓒ넷플릭스

 

K-셰프 열풍, 그 화려함 속의 그림자
최강록의 우승은 현재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K-셰프 열풍’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흑백요리사’ 시리즈의 성공 이후, 그 인기는 화면 바깥으로도 이어졌다. 출연 셰프들의 식당은 예약과 웨이팅 대란이다. 요리사는 아이돌 못지않은 팬덤을 거느리게 되었고, 편의점마다 협업 상품이 쏟아진다. 바야흐로 ‘요리사의 전성시대’다.


  이러한 미식의 대중화와 셰프의 위상 강화는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여주기식 미식’과 ‘한탕주의’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코스 요리가 SNS 인증샷을 위한 도구로 소비되고, 방송에 한 번 나오면 억대 권리금이 오가는 현상.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격언은 요식업계에도 절대적인 진리가 되었다.


  그러나 최강록은 이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시즌1 직후, 손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때 그는 오히려 운영하던 식당 ‘네오’의 문을 닫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손님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시즌2 우승 후,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그는 여전히 식당을 열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지 않는다고 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년에 조그마한 국숫집을 할 때 이번 상금을 보태 쓸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 돈을 버는 것보다, 맛없는 요리로 손님들의 좋은 기억을 해치지 않는 것이 제겐 더 중요합니다.”


  최강록은 파인다이닝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네 마음은 파인(Fine)하냐”고 되묻는다. 화려한 접시와 인테리어보다,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평온하고 정직해야 진짜 ‘파인’한 요리가 나온다는 뜻이다. 자본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뚜벅뚜벅 걷는 그의 행보는 ‘성공’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최강록의 우승은 현재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K-셰프 열풍’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넷플릭스
최강록의 우승은 현재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K-셰프 열풍’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넷플릭스

 

51%에서 53%로, 아주 더딘 성장의 미학
13년 전, ‘마스터 셰프 코리아2’ 우승 당시 그는 “요리는 제 삶의 51%”라고 말했다. 강산이 변하고, 두 번의 서바이벌을 제패한 지금, 이 숫자는 얼마나 변했을까. 그는 “이제 53%쯤 된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남들은 ‘퀀텀 점프’와 ‘압축 성장’을 부르짖는 시대에, 고작 2%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사람. 하지만 그 2%는 그가 지난 10여 년간 흘린 땀과 번뇌, 그리고 수없이 졸여낸 시간의 밀도가 응축된 숫자다. 그는 자신이 동경했던 중식의 ‘불’처럼 활활 타오르지는 못했지만, ‘물’처럼 재료 깊숙이 스며들어 본연의 맛을 끌어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방송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최강록은 다시 짐을 싸서 숨어버렸다. “흰 쌀밥에 오이짠지를 먹는 게 제일 맛있다”며 소박한 행복을 이야기하는 그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육수를 끓이고 있을 것이다.


  도파민과 과장이 지배하는 세상, 최강록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언가에 쫓겨 끓어 넘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불을 줄이고, 재료가 맛을 머금을 때까지 뭉근하게 기다려줄 시간도 필요하지 않은가. ‘척’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대로 묵묵히 저어가는 것. 그것이 최강록이 깨두부 한 그릇으로 우리에게 건넨,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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