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만은 내버려두자[안종범의 나라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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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만은 내버려두자[안종범의 나라살림]

이데일리 2026-01-29 05: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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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범 정책평가연구원 원장] 가격은 시장에서 수많은 경제주체가 각자의 정보, 기대,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내리는 선택이 쌓여 만들어지는 결과다. 교과서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어디가 부족한지, 사람들이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숫자로 응축해 보여주는 신호가 바로 가격이다. 정부는 정책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만드는 조건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가격 그 자체를 ‘이렇게 만들겠다’라고 목표화하는 순간 정책은 경제 원리와 충돌한다. 가격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과를 직접 통제하려고 하면 시장은 반드시 다른 경로로 반응하고 그 반응은 거의 항상 더 큰 왜곡과 비용으로 돌아온다.



그런데도 한국 정치경제사는 가격을 직접 붙잡으려는 유혹이 얼마나 반복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집값, 임금, 환율, 주가까지 거의 모든 가격이 정치의 대상이 돼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뒤따랐지만 경험칙은 냉정했다. 단기적 안정의 연출 뒤에 더 큰 불안과 충격이 따라왔다.

부동산 가격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값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세우며 2005년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고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대출 규제, 투기지역 지정 등 수요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투기 수요를 차단하면 가격이 안정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정반대로 반응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은 임기 중 50% 이상 상승했고 강남권은 80%를 넘는 상승률을 기록했다. 종부세 등 각종 부동산 세금 부담은 집주인에게서 끝나지 않고 전세와 월세로 전가되며 세입자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가격을 누르려는 정책이 가격 상승과 임차인 피해라는 결과를 낳았다.

문재인 정부는 이보다 훨씬 더 강한 개입을 시도했다. 공식적으로만 20회가 넘는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다주택자에 대한 취득세·보유세·양도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분양가 상한제 확대, 임대사업자 제도의 급변, 전세대출 규제 등 거의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한국 부동산 역사상 가장 큰 폭등이었다.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 2017년 약 6억원에서 2021년 12억원을 넘겼고 전국적으로도 기록적인 상승세가 이어졌다. 전세 시장은 더 심각했다. 임대차 3법 이후 서울 전세 가격은 2년 만에 30% 이상 올랐고 신규 계약에서는 절반 이상 뛰는 사례가 속출했다. 무주택자와 청년층은 전세에서 밀려나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으다) 대출로 매수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로 몰렸다. 그 결과 가계부채는 4년 만에 400조원 이상 증가했다. 집값을 잡겠다는 정책이 집값 폭등, 전세난, 가계부채 급증이라는 삼중의 충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임금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전두환 정부는 1980년대 초 고물가를 잡기 위해 임금 상승을 강력하게 억제했다.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 본격 도입한 총액임금제를 통해 기업이 지급하는 전체 임금 증가율을 정부가 직접 통제했다. 그 결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0년 약 29%에서 불과 몇 년 만에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단기 성과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기업들은 기본급을 억제하는 대신 상여금과 각종 수당, 복리후생비 같은 우회 지급을 늘렸다. 임금체계는 복잡해지고 불투명해졌으며 노사 간 불신은 깊어졌다. 억눌린 임금 요구는 결국 1987년 이후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폭발했고 1988~1989년에는 임금 인상률이 20%에 육박했다. 임금을 직접 통제해 물가는 잠시 안정시켰지만 임금 구조 왜곡과 사회적 갈등이라는 더 큰 비용을 남겼다.

최근에는 환율에서도 같은 유혹이 반복되고 있다. 환율은 한 나라의 무역 구조, 금리, 성장 전망, 정치적 신뢰, 글로벌 자본 이동이 모두 반영된 종합 결과물로서의 가격이다. 그런데도 환율이 1500원대에 육박하자 정부가 환율 억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국민연금 같은 연기금의 외환 거래 활용 가능성을 거론하며 대통령이 직접 환율 전망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전형적인 ‘가격에 손을 대는 행태’다. 환율 개입은 늘 같은 패턴을 따른다. 정부가 방어 의지를 보이면 환율은 잠시 안정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펀더멘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환율은 다시 반등하고 때로는 개입이 없었을 때보다 더 큰 폭으로 상승한다. 인위적으로 눌린 환율은 스프링처럼 되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가격 동결과 환율 통제를 반복해 왔다. 그때마다 암시장과 불신, 자본 이탈이 뒤따랐다. 베네수엘라는 더 극단적이다. 환율과 가격 통제가 일상화하면서 공식 시장은 무너지고 실질 경제는 암시장 중심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이런 극단적인 해외 사례조차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상황이다

주가 역시 마찬가지다. 주가는 기업의 미래 이익, 금리, 기술 혁신, 글로벌 자본 흐름까지 반영하는 가장 복합적인 가격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반복적으로 ‘코스피 몇천’같은 목표치를 말한다. 이런 구호는 단기적으로는 기대를 자극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다. 주가가 오르면 정치 성과처럼 포장하고 오르지 않으면 정책 실패로 해석한다. 주가를 정치의 목표로 삼는 순간 시장은 효율적 자원 배분 기능을 잃기 시작한다.

이 모든 사례는 하나의 공통된 가르침을 준다. 집값이든 임금이든 환율이든 주가든 모두 ‘결과 변수’이기에 직접 통제하면 시장은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며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가격이 아니라 가격을 만드는 구조를 고치는 것이다. 집값을 잡고 싶다면 공급을 늘리고 인허가 제도를 고치며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임금을 안정시키고 싶다면 생산성과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환율을 안정시키고 싶다면 재정과 통화 정책의 신뢰를 쌓고 무역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주가를 높이고 싶다면 규제개혁을 통한 기업경쟁력 제고, 기술 혁신, 자본시장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

정치는 눈에 보이는 숫자를 붙잡고 싶어 하지만 경제는 숫자를 붙잡는 순간 왜곡된다. 이제 가격은 내버려 두자. 대신 가격을 만드는 구조를 바꾸는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규제개혁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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