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 1세대 대표 작가…'들어내고 메우기' 독창적 기법
이우환 이어 생존작가 10억원 클럽 들어…"작품에 핏줄·맥박, 나의 모든 것 담겨"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남이 하던 게 아니라 아무도 못 하는 것을 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작업이다."
물감을 칠한 화폭을 뜯고 물감 메워놓기를 반복해 격자형 평면을 만드는 '들어내고 메우기' 기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단색조 추상화를 창조해 낸 한국 단색조 추상의 대가 정상화 작가가 28일 오전 3시 40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고인은 김환기, 박서보, 하종현 등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1932년 12월 경북 영덕 출생인 고인은 중학교부터 미술을 시작해 1953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서울대가 6.25 전쟁으로 부산에서 운영하던 시기였다.
1957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인천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학창 시절 대상을 재현하는 구상 회화를 주로 그렸던 고인은 1950년대 중후반이 지나면서 표현주의적 추상을 실험하며 한국현대작가초대전(1960), 악뛰엘 그룹전(1962),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1963) 등 다수의 정기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1965년 파리비엔날레와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도 한국 작가로 출품했다.
고인은 1967년 프랑스 파리로 갔다가 1년 만에 귀국했고,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일본 고베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시기부터 단색조 추상 작업을 시작해 고인을 대표하는 단색조의 격자형 화면 구조를 확립했다.
1978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작업에 몰두했고 1992년 11월 귀국해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짓고 줄곧 한국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2015년 10월에는 그의 작품 '무제 05-3-25'이 11억4천200만원에 낙찰돼 이우환에 이어 두 번째로 생존 작가 중 작품 가격이 10억원이 넘는 '10억원 클럽'에 속하기도 했다.
2021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업 세계를 총망라해 살펴보는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고인의 격자 추상 작업은 먼저 캔버스 윗면 전체에 고령토 약 3∼5㎜를 덮어 바른 뒤 캔버스 뒷면에 미리 그은 선을 따라 주름잡듯이 접는다. 이 과정에서 화면에 균열이 생기면 고령토를 떼어내고 그 자리를 물감으로 메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하는 고행과 같은 작업을 통해 완성된 작품들은 고인만의 독특한 조형방법론으로 평가받았다.
고인은 조수를 한 번도 두지 않고 홀로 자신만의 작업을 해왔다.
이에 대해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고 남에게 시켜도 못하는 나만의 방법론"이라며 "한 작업을 오래 하면 자신만의 철학이 생기고, 핏줄과 맥박, 나의 모든 것이 작품에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2023년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화가로서 하고 싶은 거 다 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더 잘해야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며 "예술이란 끝없는 것을 시작하는 것. 내가 끝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것을 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6호실, 발인은 오는 30일이다.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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