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련 작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이순신 장군 전시는 단순한 역사 전시를 넘어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전시장을 걸으며 나는 반복해서 난중일기의 문장들 앞에 멈춰 섰다. 그 기록들은 위대한 승리의 결과를 설명하기보다 결정하기 전의 망설임과 책임을 감당해야 했던 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순신의 기록은 후대에 남기기 위한 업적 정리가 아니라, 그날을 버텨내기 위한 사유의 흔적에 가까워 보였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오늘의 시대가 겹쳐졌다. 우리는 지금 AI가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음악까지 생성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결과물의 속도와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인간의 손은 점점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순신의 기록을 바라보며 느낀 것은 기록의 본질은 ‘결과 생산’이 아니라 ‘생각의 축적’이라는 사실이었다. AI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망설임과 책임, 선택의 윤리는 대신 감당할 수 없다.
예술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빠르고 정교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손으로 그린 그림이나 천천히 쌓아 올린 작업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순신 전시는 이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힌트를 준다. 그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를 가졌던 장군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끝까지 관찰하고 기록하며 판단했던 사람이었다. 결국 차이를 만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고의 밀도였다.
난중일기 속 문장들은 결코 매끄럽지 않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날도 있고, 스스로를 다잡는 문장도 있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이 기록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든다. 나는 이 점이 지금의 예술가에게도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AI가 매끄러운 결과를 만들어 낼수록 인간의 기록은 더 불완전해질 필요가 있다. 흔들리고, 미완성인 상태 그대로 남겨진 기록만이 인간의 사유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만날 때도 이 전시는 많은 생각을 남긴다. 아이들은 종종 “이건 AI가 만든 거예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는 기술에 대한 호기심과 동시에 ‘사람이 만든 것의 가치’에 대한 혼란이 함께 담겨 있다. 이순신의 기록을 떠올리며 나는 아이들에게 결과보다 과정을 묻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를 말할 수 있는 힘이 앞으로의 시대에는 더 중요해질 것이다.
AI 시대의 기록은 단순한 데이터 저장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생각을 언어와 이미지로 정리하는 훈련이자 판단의 근거를 남기는 행위다. 이순신이 기록을 통해 스스로를 점검했듯,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기록을 통해 기술에 휘둘리지 않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도구가 있어도 방향을 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나는 이 전시를 통해 ‘느린 기록’의 가치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작업 노트, 스케치, 아이들과 나눈 대화의 메모, 수업이 끝난 뒤 남기는 짧은 문장들. 그것들은 당장 작품이 되지 않고, 전시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순신의 기록이 그러했듯, 그 시간들은 결국 나의 사고와 태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AI는 완성된 결과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 결과를 선택하게 만든 맥락까지는 대신 살아줄 수 없다.
AI 시대의 예술은 기술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기록의 깊이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이 섞인 문장,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 망설임이 남아있는 흔적들. 그것들이야말로 앞으로의 시대에 가장 인간적인 자산이 될 것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기록으로 남은 이유 역시 그 안에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작업 노트, 아이들과 나누는 수업 기록의 의미를 다시 떠올렸다. 눈에 띄지 않고, 당장 평가받지 않는 그 시간들이 결국 나라는 사람과 작가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순신의 기록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전시는 과거의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건네기 위해 만들어진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Copyright ⓒ 문화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