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의 경기 체감이 사실상 '상시 불황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힘을 얻고 있다. 기업들이 느끼는 경기 전망이 기준선을 밑돈 기간이 47개월째 이어지면서, 단기적 침체가 아니라 구조적 둔화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제조업 부문의 체감경기가 빠르게 냉각되며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최근 발표된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는 93.9로 집계됐다. BSI는 100을 기준으로 그 이상이면 경기 전망을 긍정적으로, 그 이하이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지수가 4년 가까이 한 번도 기준선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은 기업들이 현재의 경기 상황을 일시적 충격이 아닌 '장기적 하강 국면'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제조업의 급격한 위축이다. 제조업 BSI는 88.1로 전달보다 3.7포인트 하락하며 6개월 만에 다시 80대에 진입했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원자재 가격 급등이 한창이던 시기와 유사한 수준이다. 반면 비제조업 BSI는 99.5로 소폭 상승했지만 여전히 기준선 아래에 머물며 본격적인 회복과는 거리가 있다.
제조업은 한국 경제에서 수출과 고용, 투자 전반을 떠받치는 핵심 산업이다. 이 부문이 장기간 부진한 흐름을 보인다는 것은 단순한 업황 악화가 아니라 국가 성장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섬유·의복, 전자 및 통신장비 등 전통 제조업과 첨단 산업을 동시에 아우르는 다수 업종에서 70대 초반의 매우 낮은 BSI가 나타났다. 이는 기업들이 향후 매출, 수익성, 고용 여건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제조업 부진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대내외 요인이 맞물려 있다. 우선 고환율 기조가 장기화되며 원자재와 부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크게 늘었다. 환율 상승은 수출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가격 경쟁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글로벌 수요 자체가 둔화된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익을 잠식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에너지·원자재 가격 변동성이 큰 업종일수록 환율 부담은 곧바로 수익성 악화로 이어진다.
여기에 주요국 경기 둔화 전망도 기업 심리를 짓누르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 핵심 시장에서 소비와 투자 회복이 지연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수출 기대 역시 낮아지고 있다. BSI 부문별 지표에서도 수출 전망치는 93.1로 나타나며, 수출을 통해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환경임을 보여준다. 내수(92.0), 투자(95.8) 역시 동반 부진을 이어가고 있어 경기 반등의 동력이 동시에 약화된 상태다.
비제조업의 경우 일부 업종에서 계절적 수요 확대 기대가 반영되며 제한적인 개선 흐름이 나타났다. 전기·가스·수도 업종은 115.8로 비교적 높은 수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겨울철 에너지 수요 증가와 요금 조정 기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건설업도 오랜만에 기준선 수준으로 회복했지만, 이는 대규모 회복 신호라기보다는 그간 과도하게 위축됐던 심리가 일부 되돌려진 정도라는 평가가 많다. 부동산 경기 침체, 금융 비용 부담, 미분양 증가 등의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문제는 기업 심리가 악화되면 실제 경제 활동도 위축되는 '자기실현적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경기 전망을 비관적으로 볼수록 신규 투자와 채용을 미루게 되고, 이는 다시 내수 부진과 성장 둔화로 연결된다. 이미 기업들의 투자 전망 BSI가 장기간 100을 밑돌고 있다는 점은 향후 생산능력 확충과 기술 혁신이 지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제조업 BSI가 빠르게 하락한 것은 한국 산업 구조 전반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의미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등 일부 전략 산업을 제외하면 상당수 제조업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원가 구조는 악화되고, 기술 격차는 줄어들며,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추격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심리가 장기간 얼어붙어 있다는 것은 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한 투자와 연구개발 여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이번 BSI 흐름을 단순한 경기 사이클상의 조정이 아니라 구조적 경기 저성장 국면의 신호로 보고 있다.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글로벌 보호무역 강화, 기술 패권 경쟁 등 중장기적 환경 변화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더 이상 단기 반등을 기대하기보다 '저성장 시대에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 환경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기업들은 대외 리스크에 대해서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내 규제 환경과 비용 구조 개선이 기업 심리를 회복시키는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특히 제조업의 경우 에너지 비용, 노동 비용, 환경 규제, 투자 관련 행정 절차 등이 복합적으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 체감 가능한 수준의 규제 완화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한 환율 변동성에 대응하기 위한 금융 지원과 중소·중견기업 대상 위험 관리 지원도 중요 과제로 꼽힌다. 대기업에 비해 환율 리스크 대응 여력이 약한 기업들이 비용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경영 위기에 빠질 경우, 산업 생태계 전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47개월 연속 부정적 BSI라는 기록은 단순한 통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기업들이 느끼는 한국 경제의 체질 변화, 성장 동력 약화, 그리고 불확실성의 일상화를 상징하는 지표다. 특히 제조업 부문의 체감경기 급락은 향후 고용과 수출, 투자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 침체가 길어질수록 기업들은 보수적으로 변하고, 보수적 경영은 다시 경기 회복을 늦추는 악순환을 만든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단기적 경기 부양책을 넘어 산업 구조 전환, 규제 환경 개선, 투자 인센티브 확대 등 중장기 전략이 동시에 가동돼야 한다.
지금의 기업 심리는 "조심스러움"을 넘어 "버티기 모드"에 가깝다. 제조업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의 회복 탄력성 역시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47개월째 이어진 부정적 전망은 더 이상 일시적 신호가 아니라, 정책과 산업 전략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구조적 경고음에 가깝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Copyright ⓒ 폴리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