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진지전의 별'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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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진지전의 별' 지다

연합뉴스 2026-01-28 06:55: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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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이해찬 전 국무총리 타계 소식은 여권 전체를 큰 슬픔에 빠뜨렸다.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진보 진영 전체가 애도 물결로 가득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민주주의 역사의 큰 스승을 잃었다"고 했다. 정청래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의 큰 별이 졌다"며 그를 당의 정신적 지주로 회고했고, 우원식 국회의장은 "역대 민주정부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신 분"이라며 '민주주의 큰 별'이라 기렸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안치되는 고 이해찬 전 총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안치되는 고 이해찬 전 총리

(서울=연합뉴스) 류영석 기자 =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시신과 영정이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 운구되고 있다. 2026.1.27 [공동취재] ondol@yna.co.kr

여권에선 너나없이 고인을 민주당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 당이 집권 세력으로서 지금의 탄탄한 지위를 누리게 한 공신으로 평가한다. 이는 정치인 이해찬이 여권에서 갖는 위상과 상징성을 방증한다. 실제로 그는 민주당과 그 전신이 네 차례 집권하는 과정에 산파역을 하며 '킹메이커'로 불렸다. 김민석 총리는 "네 분 대통령을 배출한 민주 세력 전체의 흔들리지 않는 상징"이라며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에 이르는 모든 민주 대통령이 이해찬을 믿고 맡겼고, 이해찬을 어려워했고, 존중하며 경청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부터 선거 전략을 주도하며 탁월한 전략가이자 선거 귀재로 불렸다. 가장 가깝게는 이 대통령의 정치 멘토로서 '킹 메이킹' 여정을 마무리했다. 자신의 공직선거에서도 7전 7승이란 전설적 전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불리한 판세를 뒤집는 승부사로 기억된다. 가장 대표적인 게 2002년 대선에서 선거판을 뒤흔들었던 수도 이전 공약을 주도한 사례다. 열세를 극복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훗날, 이 공약을 두고 "재미 좀 봤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고인의 정치적 위상은 단순히 선거 전략가이자 정신적 지주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이른바 '진지전'의 대가이자 설계자이며 사령관이었다. 여권이 지금의 우위를 점하는 기반을 구축했고, 마이너리티였던 진보좌파 진영이 현실 정치권에서 급성장할 수 있게 한 구심점이었다. 이는 그와 동지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주도한 진지전이 성공적 결과를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

진지전이란 이탈리아 좌파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창안한 정치 투쟁 전략을 말한다. 단숨에 적의 거점을 접수하는 기동전이 불가능하다면, 시간을 두고 교육·법조·언론·문화·종교계 등 주요 포스트에 진지를 구축해 사람들의 가치관을 서서히 바꿈으로써 헤게모니를 쥐는 전략이다. 주요 분야에 투입 또는 포섭한 '아군'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만큼 주요 선거에서 패해도 언제든 판을 뒤집을 수 있다. 우리 편 사고방식이 사회 주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지전은 문화 전쟁이다.

재야 출신인 고인은 투옥 전과 탓에 취업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의 첫 정식 직업은 서점 주인이었는데, 서울대 근처에 연 서점 '광장'은 단순한 책방이 아니었다. 당시 학생운동권과 재야인사들이 금서를 구하러 오고 시국과 이념 문제를 토론하던 사랑방으로 기능했다. 일종의 초소형 진지였던 셈이니, 시작부터 진지전에 천부적 재능을 보인 셈이다. 그는 이곳에서 후배 운동권인 386 세대와 교류하며 맏형 역할을 했다.

젊은 시절 이해찬 전 총리 젊은 시절 이해찬 전 총리

1988년 3월 31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한 관악구 이해찬 후보의 유세. 2026.1.25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13대 총선에서 원내에 입성한 그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인 진지 구축에 나선다. 과거 광장 시절 교류했던 386 후배들을 대거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김민석, 임종석, 이인영, 우상호, 송영길 등 훗날 민주당 거물이 되는 젊은 피들이 대거 영입됐다. 이들은 국가 핵심 진지인 국회, 청와대, 지방자치단체 등을 차지하는 데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가신 정치와 호남에 기반한 정당은 이런 수혈을 통해 이념 기반 정당으로 변모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맡은 고인은 오랫동안 보수우파의 핵심 거점이었던 교육계에도 거대한 참호를 구축해낸다. 상징적 사건은 10년간 불법 단체였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화다. 그러자 교육계 지형은 보수우파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진보좌파 성향의 전교조가 맞서는 구도로 단숨에 바뀌었다. 입시 패러다임을 바꿔 엘리트 양성이란 보수적 교육관을 흔들었고 교원 정년 단축으로 인적 쇄신도 시도했다.

이후 영화, 문학, 음악계를 비롯한 문화계에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을 중심으로 막강한 진보좌파 진지가 들어섰다. 언론계에도 언론노조 등을 통한 참호전으로 이념적 주류 교체를 이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민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참여연대와 민변 등을 통해 압도적으로 장악했고 사법부에는 특정 연구모임 등을 통해 진지 구축에 성공했다.

학계와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가 탄핵 사태로 붕괴한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진지전에서 진보좌파 진영이 확연한 우위에 섰다고 진단한다. 이런 구도가 완성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정치인이 이해찬이다. 그가 여권에서 '정신적 지주', '큰 별'로 칭송받는 이유다. 반대로 그를 몹시 싫어하는 야권의 현주소는 무기력 그 자체다. 오합지졸, 모래알, 웰빙당 등 지금 국민의힘을 향한 수식어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탄핵으로 중도 하차하고 지지율도 낮은데도 집안 싸움이 끊이질 않고 국민에게 내세울 비전도 안 보인다. 견제 세력이 이렇듯 만만하니 여권은 독주에 거리낌이 없다.

사실 야권은 그토록 미워했던 이해찬 전 총리로부터 배울 게 많다. 여전히 인물의 이미지나 개인기에 기대려는 체질을 못 고치면, 고인이 말한 대로 50년 동안 민주당 정권이 이어질 수 있다. 야권은 장기적으로 판을 짤 '설계자'가 없다는 걸 절감하고 '우파의 이해찬'을 발굴할 때다. 관가·사법부·문화계·언론 등 사회 담론을 이끄는 주요 진지에 우군을 키우지 못한 이유가 뭔지도 알아야 한다.

특히 보수 정치권은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린다', '위기 때 조직이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있다. 이런 탓에 정치 지망생들이 보수 계열 정당보다 진보 계열 정당을 선호한다는 말도 들은 적 있다. 진보 진영의 진짜 강점은 경제공동체적 동지 의식과 의리다. '경쟁자가 탈락할 경우 우파 진영에선 나의 생존만을 기뻐하지만, 좌파 진영에선 그래도 탈락자가 먹고살 수 있게 도와준다'는 인식이 여의도에 퍼져 있다. 진지전의 우열이 가려지는 지점은 의외로 실생활과 맞닿아 있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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