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웅의 정책 스토어] 21번째 칼럼입니다.
[평범한미디어 김진웅 성동구의회 정책지원관] 2024년 7월부터 위기에 처한 임산부를 위한 최후의 안전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보호출산제’가 본격 시행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내실을 들여다보면 국가가 과연 이들의 절박함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고민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25년 3월 초록우산 아동복지연구소에서 발간한 <위기 영아-임산부 지원의 필요성 및 제도 개선방안>에 따르면 현재 위기 임산부에게 제공되는 의료비, 보육료, 생활비 중 별도로 편성된 특화 예산은 사실상 전무하다. 모든 임산부에게 지급되는 보편적 지원금을 이름만 바꿔 내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통의 지원’이 아니라 ‘특수한 지원’이다. 경제적 궁핍함과 사회적 고립이라는 이중고를 겪는 이들에게 일반적인 바우처를 던져주며 국가의 책무를 다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기만이자 행정 편의주의의 극치다.
김진웅 정책지원관의 모습.
제도의 실효성을 뒷받침할 지자체의 움직임은 더욱더 처참하다. 17개 시도 중 광주와 경북을 제외한 15곳이 조례를 제정했다고는 하나, 정작 현장에서 행정을 집행하는 기초단체의 조례 제정률은 고작 ‘16%’에 머물러 있다. 전국 234개 지역 중 단 24곳만이 법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위기 임산부가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보호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거나 아예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앙정부가 생색내기식 법안을 던져놓는 동안 지자체들은 예산과 책임의 무게를 서로 떠넘기며 관망하고 있다. 16%라는 숫자는 한국 사회가 위기 영아와 임산부를 대하는 차가운 온도에 불과하다.
더욱이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은 기술적 진보를 따라가지 못한 채 퇴행을 반복하고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예견한 ‘제3의 물결’을 지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할 수 있는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출산과 양육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견고한 가부장제의 굴레 속에 갇혀 있다. 위기 임산부가 자신의 신원을 지우면서까지 고립을 택하는 배경에는 아이를 온전히 ‘여성만의 짐’으로 치부하고, 미혼모나 위기 임산부에게만 도덕적 낙인을 찍는 후진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국가는 첨단 기술로 미래를 논하면서도, 정작 새생명을 품은 여성들이 겪는 실존적 불안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부주의의 결과로 치부하며 외면하고 있다. 기술적 진보가 무색하리만큼 퇴행적인 가부장적 책임 전가는 보호출산제라는 이름 뒤에 숨은 국가의 나태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보호출산제로는 위기 임산부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 <그래픽=연세춘추>
<피로사회>를 저술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했듯이 현대 사회의 불안은 체제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소외시키는 구조에서 기인한다. 보호출산제는 이러한 소외된 자들에게 ‘익명성’이라는 도피처를 제공할 뿐, 그들이 다시 사회로 복귀하거나 아이를 직접 양육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지 못한다. 보호출산제를 위한 특화 예산이 부재한 상황에서 위기 임산부는 결국 경제적 한계 때문에 양육을 포기하고 ‘이름 없는 출산’을 선택하게 된다. 국가가 위기 임산부에게 양육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익명성이라는 커튼 뒤로 아이를 유기하도록 방조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는 위기 임산부가 왜 신원을 숨겨야만 했는지 그 불안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단순히 가명을 쓸 권리를 주는 것이 보호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편적 지원금의 재탕이 아니라 위기 임산부의 주거, 생계, 양육을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별도의 특별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다. 또한 지자체는 조례 제정을 통해 지역별 격차를 해소하고 촘촘한 밀착형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16%라는 부끄러운 제정률을 방치하는 한, 보호출산제는 생명을 구하는 제도가 아니라 책임을 방기하는 제도로 남을 것이다. 국가의 무책임을 익명성으로 가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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