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대안은 신정 체체와 팔라비 왕조 부활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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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대안은 신정 체체와 팔라비 왕조 부활뿐일까

프레시안 2026-01-27 12:59: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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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말, 이슬람공화국 체제의 오랜 지지층이었던 바자르(전통시장 상인)의 시위로 촉발된 이란의 저항운동이 끔찍한 대량 학살로 이어진 뒤에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애초에 바자르가 시위에 나선 것은 경제 파탄과 정책 실패, 혁명수비대의 부패에 항의하기 위해서였지만, 1월 초에 시위가 전국의 여러 계층으로 확산한 뒤에는 이슬람공화국 자체가 타도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시위에 대해 신정 체제가 내놓은 답은 무차별 총격이었다.

이번 저항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팔라비 왕조 부활'이 시위대의 구호로 자주 등장했다는 점이고, 그래서 이 시위를 미국과 이스라엘이 펼친 공작의 결과이자 1979년 혁명을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시도로 단정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설령 이런 요소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자국민을 무참히 학살할 수 있는 체제,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는 체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오래 생존하기도 힘들다. 이슬람공화국은 민간인 학살을 통해 생명을 연장한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더 빨리 지상에서 사라져야 할 체제임을 입증했을 뿐이다.

1970년대 말 전 세계를 격동시켰던 이란혁명의 결과가 자국민 학살이라니,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결말도 달리 없을 것이다. 1979년 이란혁명은 분명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 무렵 7, 8살에 불과했던 나조차 흑백TV 화면에 자주 나온 팔라비 2세나 호메이니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할 정도다. 어린이에게도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었다면, 불과 몇 개월 후 '서울의 봄'을 겪게 될 한국인들에게 이란혁명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1980년 5월 광주를 몇 배로 확대한 듯한 오늘날 이란의 현실에 더욱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이런 물음들을 던지게 된다. 이란혁명은 결국 이렇게 되고 말 운명을 처음부터 타고났던 것인가? 이란은 정말 신정 체체와 팔라비 왕조 부활이라는 두 암초 외에는 다른 대안이 싹틀 수 없는 불모의 땅인가? 이것이 이란을 넘어 서남아시아 이슬람권 국가들의 숙명인가?

▲10일(현지시간) 온라인에 공개되기 시작한 이란 카흐리자크에 있는 테헤란주 법의학 진단 및 실험실 뜰에 다수의 주검 가방이 놓여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이슬람공화국 아닌 다른 씨앗을 풍부히 품고 있었던 이란혁명

이 물음들의 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이란혁명사에 관해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도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란혁명은 참으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여 다양한 대안을 놓고 경합한 사건이었다. 현재의 이란이슬람공화국은 결코 이 혁명의 유일한 '필연적' 결말이 아니었다. 이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대안들을 애써 파괴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 과정을 추진한 힘들 가운데에는 이슬람 반동세력도 있었고, 제국주의도 있었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시아파 성직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이란혁명의 유일한 주역이 아니었다는 사실, 이슬람이 이란혁명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혁명의 주역 중에는 좌파도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정당(투데당)도 있었고, 같은 이념을 따르는 무장단체(페다인)도 있었다. 아니, 호메이니의 지도력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다 결국 숙청의 희생양이 되고 만 이런 좌익 정파들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바로 파업투쟁을 통해 팔라비 왕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석유 부문을 비롯한 각 산업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란 노동자들은 1978년 봄부터 파업에 돌입하여 왕정의 돈줄(석유 수출 수익)을 끊었고 가을부터는 온갖 시위의 중심에 섰다. 이들은 이란판 '중앙정보부' 사바크가 만든 어용 노동조합 대신 '파업위원회'라는 자율적 조직을 만들어 아예 생산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한국 노동자들이 1987년 민주항쟁 '직후에' 자발적 파업을 벌이고 민주노동조합을 만든 일(노동자대투쟁)이 이란에서는 10년 일찍 벌어진 셈이었고, 더구나 민주혁명과 '동시에' 전개됐던 것이다. 팔라비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공화국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과도기(1979-80년) 동안 파업위원회는 '쇼라'라는 이름의 노동자평의회로 발전해 자본과 국가 대신 산업을 관리했다. 노동계급의 조직과 의식이 이 정도로 발전한 사례는 세계사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

노동자들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호메이니 세력을 일방적으로 추종한 것처럼 평가받는 학생, 청년들 사이에서도 호메이니파 성직자들이 처음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젊은 세대에게는 호메이니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교사가 있었다. '시아파의 해방신학자'라 불리는 알리 샤리아티(1933-1977)가 그 사람이다. 팔라비 왕정의 토지개혁과 여성권 신장 정책(이른바 '백색혁명')에 반발해 정치활동에 뛰어든 호메이니와 달리, 샤리아티는 이슬람 시아파 사상에서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여성 평등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찾아내려 했다. 프랑스 유학 중에 프란츠 파농의 영향을 받은 샤리아티는 양복을 입은 채로 이슬람 사원에서 쿠란과 현대 사상을 넘나드는 어휘를 구사하며 혁명을 설교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함정은 이미 샤리아티의 사상에도 있었다. 샤리아티는 서구 문명과 이슬람 시아파 전통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면서 후자를 현대 정치 상황에 너무 낙관적으로 주입하려 했다. 현재 이슬람공화국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 같은 이들이 나중에 샤리아티 사상의 이런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켜 신정 체제에 대한 지지를 끌어모으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샤리아티가 아무리 시아파 전통과 현대 정치를 무리하게 접목시키려 했어도 시아파 성직자가 '최고지도자'가 되어 대의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체제까지 옹호했던 것은 아니다. 샤리아티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에 사망하지만 않았어도 성직자들이 '이슬람'의 후광을 독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시아파 성직자들도 생각보다 더 다양했다. 이란혁명을 이끈 '아야톨라'(시아파 12이맘파의 최고 성직자)는 호메이니,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팔라비 왕정에 맞선 투쟁 이력에서는 오히려 호메이니를 앞섰던 또 다른 아야톨라, 마흐무드 탈레가니(1911-1979)가 있었다. 탈레가니가 정치에 뛰어든 계기는 호메이니와 달리 개혁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열렬한 지지였다. 그는 1950년대 초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의 석유 국유화 정책을 지지했고,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로 모사데크 정부가 무너진 뒤에는 모사데크 지지자들 그리고 샤리아티 등과 함께 반팔라비 연합전선 '이란 자유운동'을 결성하여 반독재 투쟁을 이끌었다.

탈레가니는 호메이니와 달리 진심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지했고, 샤리아티처럼 이슬람 전통에서 사회주의의 근거를 찾으려 했다. 그럼에도 혁명 초기에는 호메이니파와 연합전선을 유지하려 했고, 이것은 호메이니의 권력만 더 다져주고만 뼈아픈 실책이었다. 뒤늦게, 하지만 아직 혁명 초기에 해당하던 1979년 4월부터 탈레가니는 호메이니가 독재를 수립하려 한다며 공공연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두 아들이 전격 체포됐고, 이를 항의하던 탈레가니는 9월에 돌연 사망한다. 호메이니는 현란한 추도사를 늘어놓았지만, 사인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성직자는 모하마드 카젬 샤리아트마다리(1906-1986)다. 샤리아트마다리는 비록 호메이니(1900년생)보다 나이는 몇 살 아래였지만, 호메이니보다 먼저 '대아야톨라'가 된 인물이다. 팔라비 2세가 정적인 호메이니를 쉽게 처형하지 못하도록 호메이니를 '대아야톨라'로 승격해준 장본인이 샤리아트마다리다.

그러나 샤리아트마다리는 정치에 관해서는 호메이니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우선 성직자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 자체에 반대했다. 그러다 팔라비 독재가 극심해지고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자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호메이니의 신정 체제 구상에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성직자가 세속 정체의 위에 군림하며 이를 심판하는 체제, 호메이니가 정착시킨 현 이슬람공화국 체제는 본래의 시아파 12이맘파 교리에 위배된다고 판정했고, 제대로 된 의회민주주의 복원을 주장했다.

호메이니의 독주를 보다 못한 샤리아트마다리는 혁명이 한창이던 1979년 2월에 이슬람인민공화당을 창당해 호메이니 세력에 맞섰다. 현 이슬람공화국 체제의 골조가 담긴 호메이니 측의 헌법안에 반대했고, 미국 대사관 점령에도 반대했다. 그러자 호메이니파가 내놓은 대답은 샤리아트마다리의 무기한 연금과 이슬람인민공화당의 강제 해산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1982년에는 샤리아트마다리의 대아야톨라 직까지 박탈하고 그를 추종하는 성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현 이란 헌법은 이런 다양한 혁명 세력들의 잇단 숙청 광풍 속에 제정됐다. 달리 말하면, 1978-1979년에 거리에서 함께 싸웠던 모든 이란 민중의 꿈이 무시되지 않고 반영됐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헌법이었다. 하지만 헌법 제정 전까지 단행된 숙청만으로는 호메이니파의 뜻대로 신정 체제를 공고히 하기에 여전히 부족했다. 그만큼 이란혁명의 역동성과 다양성은 뿌리가 깊었다. 마지막 반란이 시도됐고, 그 주역은 새 헌법으로 선출된 첫 번째 대통령, 아볼하산 바니사드르(1933-2021)였다.

반팔라비 학생운동 출신인 바니사드르는 세속 정치가였지만, 망명 중에 호메이니와 오랫동안 협력했기 때문에 이슬람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감으로 낙점됐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한 바니사드르는 호메이니파가 다수를 차지한 의회와 대결하면서 헌법상의 '최고지도자' 호메이니의 권위에 맞섰다. 샤리아티 사상을 따르는 무장단체 '인민 무자헤딘'과 앞에서 말한 또 다른 무장단체 '페다인' 그리고 쿠르드 민족해방 세력이 대통령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직선 대통령조차 '최고지도자'를 거역할 수 없는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981년 7월 바니사드르는 패배를 자인하고 과거 반팔라비 운동의 거점이었던 프랑스로 망명했다.

바니사드르의 반란이 무산되고 난 뒤에 신정 체제는 이제 이란에 남은 유일한 야당, 투데당을 마지막 숙청 대상으로 삼았다. 만 명이 넘는 투데당 간부와 당원들이 아무 혐의 없이 투옥됐지만, 서방 국가들은 무슬림만큼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투옥된 투데당원, '페다인'과 '인민 무자헤딘' 단원 수천 명에 대한 1988년의 사형 집행은 죽음(1989년)을 앞둔 호메이니의 마지막 '업적'이었다.

▲소셜미디어(SNS)에 공개된 지난 9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 거리에서 시위대가 모닥불을 둘러싸고 춤을 추는 모습. ⓒAP=연합뉴스

로자바에서 쓰러지고 있는 또 다른 가능성

지금까지 요약한 이란혁명사는, 혁명기 이란에 현 이슬람공화국 체제와 뚜렷이 구별되는 대안들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지금 이란 현실은 이런 대안들을 의도적으로 압살한 끝에 도달한 결말임을 말해준다. 만약 이러한 역사를 그저 적자생존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며 합리화한다면, 신정 체제와 팔라비 왕조 부활이라는 두 암초 사이에 갇힌 이란은, 더 나아가 서남아시아 이슬람권 국가들은 앞으로도 그 좁은 공간에 계속 끼어 있어야 할 운명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는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다. 역사의 '해방적' 전개를 차단하려는 지배자들, 반동파의 엄청난 개입의 노력이 낳은 결과였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지금 서남아시아의 다른 곳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이란 서쪽의 시리아가 그곳이다.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장악한 시리아 과도정부는 새해 벽두부터 '북동시리아 민주자치행정부(DAANES)'를 공격하고 있다. 로자바 등의 시리아 북동부에서는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10여 년 넘게 쿠르드 민족해방운동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이 전례 없는 자치 실험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국가사회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 제3세계 혁명들과는 달리 민중이 직접 참여하여 상향식으로 결정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추진했고, 21세기 상황에 맞게 생태주의와 여성주의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 실험은 '로자바 혁명'이라 불리며 세계인의 눈길을 끌었다.

지금 시리아 과도정부가 이 혁명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 민주자치행정부는 과도정부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평화협상에 나섰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면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의 총애를 받는(단지 과도정부가 러시아의 역내 개입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과도정부는 눈엣가시 같은 로자바 혁명을 용인해줄 생각이 없다. 물론 민주자치행정부를 지지하는 민중들은 결사 항전하고 있다. 10여 년 전 이슬람 파시스트(ISIS)를 격퇴했듯이 과도정부 군대 역시 물리치고 말겠다는 각오다. 그러나 전황이 만만치 않다. 마치 프랑코 군의 최후의 일격만 기다리던 스페인 공화정부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역사의 '해방적' 돌파구를 열려 한 예외적 시도가 다시 한번 강제로 중단되려 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를 위해 제국주의 세력과 반동파가 막후 거래도 아니고 아예 공공연히 협력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당장 급선무는 물론 로자바의 불꽃을 어떻게든 꺼뜨리지 않는 것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의 광주 시민군 같은 처지에 놓인 로자바 민중에게 비록 실질적 도움은 주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누가 지금 인류의 전위이고 누가 그 적인지만은 분명히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다시 한번 전선이 한참 뒤로 밀린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해선 안 된다. 이제껏 우리에게 익숙했던 역사와는 다른 역사를 실현하려다 쓰러진 '패배'는 그 어떤 것도 단순한 패배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이 기억을 패배로 남겨둘 수 없다는 메시지를 후대에게 전한다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이미 패배와는 다른 무엇으로 반전되려고 요동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란 민중들은 바로 이 요동치는 잔해들을 다시 불러내며 새롭게 이음으로써 싸움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다른 모든 나라의 민중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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