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나 아웃렛 의류 매장에 갈 때마다 진열된 기성복의 종류와 디자인에 입이 딱 벌어진다. 선택의 폭이 워낙 넓어 오히려 선택이 힘들 지경이다. 표준 체형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위한 옷도 모두 기성복으로 나와 있는 세상이다. 요즘은 양복을 맞춰 입는 사람도 별로 없다.
나는 대체로 고전적이면서 무난한 옷을 선택한다. 내 옷장에는 거의 비슷한 모양과 색상의 옷이 가득하다. 의류 매장에서 디자인이 튀는 옷을 쳐다보기도 하지만 실행에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한다. 그래서 개성이 뚜렷한 의상을 입고 다니는 젊은이를 보면 한편 부럽기도 하다.
음식은 어떤가. 동네마다 음식점 종류도 많고 메뉴도 다양하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음식이 다르고 입맛도 천차만별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음식도 의상처럼 선택의 폭이 넓어 오히려 선택이 힘들다. 그런 이유로 매일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것도 고민이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에서 반경 약 1㎞ 범위 안에 있는 선호하는 맛집 지도를 그려놓고 돌아가면서 점심을 먹는다.
인간 기초 수요라고 하는 의·식·주에 있어서 나는 평생 주거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창 건설 경기가 좋았던 젊은 시절에는 단독주택이나 다가구·다세대주택 설계를 많이 했고, 전원주택 붐이 한창일 때는 전국 여기저기에 전원주택을 설계했다. 소규모 근생 건물은 대부분 최상층에 건축주가 사는 집을 설계해달라는 주문이 많았다.
주택 설계를 하다 보면 옷이나 음식에 못지않게 집에 대한 요구 사항이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가족 구성원마다 요구 사항이 모두 다르다. 고전적인 집의 외관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조건 현대적인 디자인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목구조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고, 철근 콘크리트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방의 위치나 크기, 가구 배치, 재료, 색상에 대해서도 까다로워 가족 구성원의 의견을 조정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내가 설계한 수많은 주택 중에 똑같은 디자인을 반복해서 설계한 경우가 없다. 매번 다른 가족 구성원의 요구 사항을 반영하다 보면 늘 새롭고, 설계하는 데 몇 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건축사 입장에서 보면 주택 설계에 소요되는 시간과 감정 에너지의 소모는 상당하다. 가족 중에 누가 대표로 의견을 취합하고 결정을 주도하면 좋겠으나 그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대체로 주부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기는 하나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설계 금액도 문제다. 건축사와 건축주의 설계 금액에 대한 체감 지수는 많이 다르다. 주택은 공사비 총액 규모가 큰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설계비에 예민하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 심지어 설계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시공사도 있다. 물론 공짜에 혹했다가는 물고기가 찌에 속아 낚싯바늘을 물 듯 시공사에게 된통 당하게 된다.
여하튼 지금 대부분의 건축사사무소에서는 주택 설계를 하지 않는다. 소요되는 에너지에 대한 적정한 설계 금액을 받기 힘들기도 하지만 주택은 설계 과정도 복잡하고 최종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도 어렵다. 그보다 이제 단독주택에 대한 수요가 없어 설계를 할 기회조차 사라졌다.
서울 근교를 지나다 보면 터만 닦아놓고 방치된 전원주택지가 많다. 부동산 정보 사이트에는 매물로 나와 있는 수도권 전원주택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이렇게 단독주택이 인기가 없는 것은 초고령 사회로 접어든 것도 주요 요인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도시뿐만 아니라 농어촌도 아파트가 주거 유형의 대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문제는 아파트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 없이 오로지 건설회사의 경제적 논리가 만들어 놓은 변형 불가능한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아파트가 대세인 것이 어쩔 수 없다면 최소한 라이프 사이클의 변화에 맞게 리모델링할 수 있는 제품을 제공해야 한다.
즉, 지금처럼 벽을 털 수 없는 내력벽 구조를 지양하고 비내력벽을 자유로이 털 수 있는 기둥과 보로 이루어진 라멘조로 바꾸어야 한다. 체형의 변화에 맞게 옷을 수선하듯 살면서 나에게 맞도록 집도 변경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라멘조=기둥과 보가 하중을 지탱하는 건축 구조다. 벽이 건물의 무게를 견디는 내력벽 구조와 달리 내부 벽을 자유롭게 허물고 세울 수 있어 공간 구성이 자유롭고 리모델링에 유리하다.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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