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속 저사양 최적화로 경량화 AI 역량 키워
음성·바둑 기술, 군사·감시용 실전 단계로 진화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글로벌 빅테크가 엔비디아의 H100 GPU(그래픽처리장치) 확보에 사활을 걸며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붓는 동안에 정반대 편에서 'AI 기술의 극한'을 시험하는 곳이 있다. 북한이다.
최신 고성능 반도체 접근이 원천 봉쇄된 '디지털 고립' 상태.
통념대로라면 AI 개발이 불가능해야 할 이 척박한 땅에서 북한은 독자적인 생존법을 찾아냈다. 하드웨어의 절대적 열세를 소프트웨어(알고리즘) 최적화로 상쇄하는 전략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저사양 환경에 특화된 '경량화 AI' 역량을 비대칭적으로 키워왔다고 진단한다.
겉보기엔 낡은 기계지만, 그 안에서 최대 성능을 쥐어짜는 이른바 '북한식 가성비 AI'가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 국제 학술지가 입증한 실력…"저사양 최적화에 사활"
북한의 AI 기술력은 단순한 내부 선전 구호가 아니다. 국제 학술 데이터가 이를 증명한다.
38노스(38 North)가 IEEE(전기전자공학자협회)와 스프링거(Springer) 등 국제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김책공업종합대학·김일성종합대학 등 북한 연구진이 저자로 참여한 AI·머신러닝 관련 논문은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수십 편에 달한다.
외부 전문가들이 분석한 북한의 연구 동향은 '결핍의 극복'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된다. 텍스타일, 로보틱스, 사이버보안 등 분야는 다양하지만, 접근 방식은 일관되게 '효율성'을 지향한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거대언어모델(LLM) 구축 대신 ▲제한된 연산 자원에서의 최적화 ▲클라우드 자원의 효율적 배분 ▲저해상도 영상의 고품질 처리 등 악조건을 돌파하는 기술에 방점이 찍혀 있다.
실제 김일성종합대와 김책공대 논문에는 저사양 장비에서 처리 속도를 높이거나, 적은 데이터로 인식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경량화 기법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국내 AI 학계 관계자는 "북한 논문을 보면 수식 전개와 알고리즘 최적화에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공을 들인다"며 "이는 1990년대 개발자들이 1KB 메모리를 아껴 쓰려 코드를 깎던 모습과 흡사하다"고 설명했다.
역설적으로 이런 접근은 최근 글로벌 IT 업계 화두인 '온디바이스(On-Device) AI'의 기술적 지향점과도 맞닿아 있다.
◇ 생활 속 파고든 AI…'룡남산'과 '아침'의 진화
실험실을 벗어난 북한 AI는 주민 일상과 산업 현장에 이미 깊숙이 침투했다.
대표 주자는 김일성종합대 AI 연구소가 개발한 음성인식 프로그램 '룡남산'이다.
대북 선전매체와 관련 보고서를 종합하면 룡남산은 딥러닝을 기반으로 북한 특유의 억양과 발음을 인식하도록 설계됐다. 초기 사회과학 용어 위주였던 인식 범위는 최근 자연과학과 교육 분야로 확장된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 스마트폰(지능형 손전화기)과 교육용 소프트웨어에도 룡남산 기반 인터페이스가 탑재돼 텍스트 입력과 기기 제어를 돕는다.
이는 북한이 장기간 내부 음성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학습에 활용해 왔음을 방증한다. 자연어 처리(NLP) 성능은 데이터의 양과 질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기계번역 시스템 '아침', '무지개'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은 다국어 번역 시스템 '룡마(Ryongma)'가 영어·중국어·일본어 등 7개 언어를 처리하며, 번역 정확도가 전문가 수준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탈북 IT 인력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시스템은 일상 회화보다 과학기술·정책 문서 번역에서 문맥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해외 최신 기술 습득을 위한 도구로 AI 번역을 전략적으로 육성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은별'이 닦고 군사가 잇는다…게임에서 군사용 AI로
북한의 AI 역사는 짧지 않다.
1990년대 후반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은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 '은별(Silver Star)'이 그 출발점이다.
당시 은별은 일본 등지에서 상용화될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이때 축적된 '최적의 수를 찾는 알고리즘'과 패턴 인식 노하우는 북한 AI의 DNA로 남았다.
군사 전문가들은 바둑 AI에서 검증된 탐색·최적화 기술이 워게임(War Game), 사격 통제, 미사일 궤적 최적화 등 국방 분야로 전이됐을 가능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범용 인공지능(AGI) 역량은 뒤처져 있을지라도, "주어진 자원 내에서 승률을 극대화"하는 협소 인공지능(Narrow AI) 분야에서는 위협적인 수준에 도달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 감시 사회의 '눈'이 된 AI…CCTV의 고도화
가장 우려스러운 지점은 컴퓨터 비전 기술을 활용한 감시 시스템의 고도화다.
38노스와 스팀슨센터 분석에 따르면 북한은 2000년대 후반부터 생체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했고, 얼굴인식 기술은 이미 실전 배치 단계다.
평양과 국경 지역 감시망은 중국산 장비에 북한 자체 개발 안면인식·객체 추적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북한, 코로나19 방역용 '로봇' 공개…둥근머리에 빨간눈 깜빡(서울=연합뉴스) 북한이 자체 개발한 방역용 로봇을 깜짝 공개했다.
조선중앙TV는 지난 23일 '전국 방역보건부문 과학기술발표회 및 전시회' 개최 소식을 보도하면서 '지능방역로보트'가 출품됐다고 소개했다.
로봇은 둥근 머리에 빨간 눈, 두 팔이 있어 인간형을 본떴다.
중앙TV는 이 로봇이 어떤 기능을 갖췄는지는 소개하지 않았다. [조선중앙TV 화면]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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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기술 고도화의 기폭제가 됐다.
마스크 착용자 식별 수요가 급증하면서, 눈과 미간 등 특징점만으로 신원[009270]을 추정하는 알고리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북한 대학 논문과 특허에서도 저화질 CCTV 영상을 선명하게 보정하는 '슈퍼 해상도' 기술, 군중 밀집도 분석 기술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AI가 체제 감시를 위한 핵심 도구가 된 셈이다.
◇ GPU 제재 속 '경량화 괴물'…봉인 해제 시 파급력은
물론 한계는 명확하다.
엔비디아 H100급 GPU와 대규모 데이터센터 없이는 챗GPT 같은 초거대 모델 운용은 불가능에 가깝다. 제재를 우회해 게임용 그래픽카드(RTX 시리즈 등)를 일부 확보하고 있지만, 인프라 격차를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 '결핍'이 북한 AI를 독특한 방향으로 진화시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은 무거운 모델을 가볍게 만들고, 열악한 장비에서 극한의 효율을 뽑아내는 '생존형 최적화' 기술을 연마해왔다.
대북 전문가들이 북한 AI를 '거대 모델'이 아닌 악조건 속의 '실전형 모델'로 정의하는 이유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북한이 '코드 깎기'로 축적한 고효율 알고리즘이 향후 제재 해제나 우회 경로를 통해 강력한 하드웨어와 만났을 때 낼 시너지다.
그 잠재력이 봉인 해제되는 순간, 우리가 예상치 못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경고를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
president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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