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금융은 연체로 흔들린 개인이 경제생활의 궤도로 다시 올라설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다. 금융의 문턱을 낮추려는 선의로 출발했지만, 성실상환자의 허탈감과 신용도별 금리 역전 같은 부작용도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연체를 단순히 ‘모럴 해저드’로만 볼 수도 없다. 개인의 상환 실패에는 경기, 소득 구조, 금융 접근성 등 다양한 요인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복잡한 맥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단순한 메시지로만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법무법인의 광고는 “빚 갚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문구로 제도를 축약하고, 온라인에서는 채무조정 사례가 마치 ‘리스크 없는 성공담’처럼 회자된다. 정책 홍보조차 제도의 설계와 한계를 설명하기보다는 결과만 부각하면서 포용금융의 본래 취지가 흐려지고 있다. 이번 시리즈는 제도와 시장, 그리고 정보 환경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지금의 포용금융이 어떤 언어로 이해되고 있는지를 차분히 짚어본다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포용금융은 연체 국면에 들어선 차주가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복귀하도록 돕는 제도적 안전망이다. 이는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부실이 장기화될 때 발생하는 금융권 손실·신용 왜곡·추심 갈등·복지 지출 확대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관리 장치’로 설계돼 왔다.
다만 제도가 확대될수록, 그 성패는 취지보다 전달에서 갈린다. 공공성을 띤 ‘재기’와 ‘관리’의 언어가 시장에서 탕감이나 면책으로 단순화될 때, 제도는 취약차주를 돕는 회복 경로가 아니라 상환질서를 흔드는 메시지로 오해될 수 있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온라인·SNS·포털 광고 시장에서 일부 법무법인과 대행업체가 “빚, 갚지 마세요”, “지금 갚으면 낭비” 같은 자극적 문구를 전면에 내세워 채무조정·개인회생 관련 홍보를 확대하는 흐름이 포착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문구가 제도의 ‘일부 결과’를 마치 보편적 해법처럼 일반화한다는 점이다. 채무조정과 개인회생은 무조건적 면제가 아니라 소득·재산·채무 구조와 절차 요건을 충족해야 작동하는 조건부 관리 메커니즘에 가깝다. 그럼에도 단편적 슬로건이 복잡한 전제와 책임을 지워버리면서, 제도가 ‘회복의 통로’가 아니라 ‘상환 회피의 기술’로 오인될 여지를 키우고 있다.
재기 장치의 수요, ‘현실의 통계’가 됐다
연체 이후 제도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실제로 그 문턱을 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현실이 있다. 신용회복위원회 통계 기준 2025년 상반기 채무조정 신청자는 10만명을 넘어섰고, 연간 20만명 돌파 가능성도 제기됐다.
법원 통계에서도 ‘재기 제도’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서울회생법원이 공개한 2025년 상반기 개인회생 통계조사 결과보고서는 사건의 구성·생계비 인정 등 세부 항목을 통해, 개인회생이 특정 집단의 ‘특수한 선택’이라기보다 생활경제의 압력을 반영하는 경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책 또한 이 수요를 전제로 움직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2025년 정책서민금융을 역대 최대 수준으로 공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고, 2026년에는 포용적 금융 대전환 기조 아래 금융소외자 대상 정책서민금융을 시중금리보다 3~6%p 낮춘 조건으로 제공하며, 새희망홀씨 공급 확대(2028년 6조원)와 5대 금융지주의 향후 5년 70조 공급 계획도 함께 제시했다.
여기서 핵심은 ‘지원 규모’ 자체가 아니다. 정부·금융권이 연체를 방치할 경우 부실이 장기화되고, 그 비용이 금융시장·복지·고용 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과 관리의 회로를 넓히는 중이라는 점이다. 실제 정부는 연체 단계에서 과도한 이자부담·추심을 제한하고, 채무조정 요청 기회를 부여하는 등 ‘관리의 규칙’을 세분화하는 정책도 추진해왔다.
그런데 제도가 촘촘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시장에는 더 단순한 말이 유통된다. ‘채무조정’은 ‘탕감’으로, ‘회복’은 ‘공짜 해결’로, ‘관리’는 ‘버티면 된다’로 치환되는 일부 부적절한 마케팅의 영향이다.
‘탕감의 언어’가 삼킨 신뢰…피해는 취약차주에게로
광고의 문법은 언제나 ‘지금 당장’을 요구한다. ‘무료 상담’, ‘성공 사례’, ‘즉시 승인’ 같은 단어로 불안을 앞질러 결정을 당긴다. 반면 비용의 발생 시점, 기각 가능성, 변제계획 이행 부담, 재신청 리스크 같은 핵심 정보는 뒤로 밀린다. 그 결과 취약차주는 제도를 ‘이용’하기보다 제도 주변의 시장에 ‘소비’되기 쉽다.
단기적으로는 ‘숨통이 트이는’ 안도감이 주어지지만, 장기적으로는 추가 비용과 이행 부담, 신용 손상 등 보이지 않는 비용이 누적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사례도 표면화됐다. “빚 갚지 마세요” 식의 불법 개인회생 영업을 넘어, 일부 로펌이 개인회생 의뢰인에게 수임료를 대출로 마련하라고 권유한 행태가 포착되기도 했다. 이 경우 수임료 대출은 면책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어, 회생 이후에도 새로운 상환 부담이 남을 수 있다.
법무법인 광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금융당국은 불법사채 해결·대출중개를 내세우며 수수료를 요구한 뒤 잠적하는 이른바 ‘솔루션업체’ 피해 확산에 대해 소비자경보를 낸 바 있다. 연체와 재기의 제도를 둘러싸고, 취약차주가 가장 절박한 순간에 오히려 정보 비대칭의 타깃이 되는 구조가 겹치는 셈이다.
제도 자체가 아니라 제도를 둘러싼 정보 유통 방식이 문제라는 지적은 소비자학 관점에서 더 선명해진다. 불안과 절박함이 큰 금융위기 국면에서는 광고 문구가 사실상 ‘의사결정의 프레임’으로 작동하면서, 제도의 조건과 비용을 가리는 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는 “포용금융의 취지는 위기 상황의 차주가 제도권 경제활동으로 안정적으로 복귀하도록 돕는 데 있다”는 점을 전제로, “‘굳이 갚지 않아도 된다’는 상업적 메시지가 반복되면 상환 책임을 경시하는 인식이 확산되고, 정책의 정당성과 제도의 지속 가능성까지 흔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다고 상환 기대가 약해질 때마다 ‘포용금융을 더 늘리면 된다’고 단순화하긴 어렵다. 포용금융은 연체의 충격을 완화하는 안전망이지만, 재정·보증 여력과 선별 기준이라는 제약 위에서 작동한다. 상환 규범이 흔들리면 은행은 위험을 금리와 심사에 더 보수적으로 반영하고, 정책은 그 비용을 더 많이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다.
결국 ‘지원의 확대’만으로는 역효과를 막기 어렵고, 제도 취지가 ‘회복’이 아니라 ‘회피’로 읽히는 순간 시장 전체의 비용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준선 전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채무조정·면책 제도를 “장기 부실 비용을 줄이기 위한 공공적 안전판”으로 규정하면서도, ‘버티면 탕감’ 프레임이 퍼질 경우 “상환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약해지고, 금융기관은 리스크를 프리미엄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어 금리 상승·공급 위축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소재 대학 한 경제학과 교수 또한 “취약차주 지원은 민간 은행의 금리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정부 보증과 정책금융을 통해 리스크를 분담하는 방식이 시장 왜곡을 줄인다”며 “은행은 신용평가 모델에 기반한 심사·가격 체계를 투명하게 운영하고, 정부는 절대적 규모를 늘리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계층을 정교한 안전망으로 보완하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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