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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경기)=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전망대에 서서 북녘을 향해 난 난간 앞에 섰다. 그날 애기봉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도, 마을도, 경계선도 안개 뒤로 사라져 있었다. 불과 1.4㎞ 건너에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풍경은 끝없이 비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렌즈 너머 남아 있는 건 희뿌연 회색뿐이었다. 이곳에 서면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라 기대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이날의 안개도 그랬다. 가깝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확인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기대를 말하기엔 이르고, 단절이라고 단정 짓기에도 애매한 거리감이 ‘애기봉’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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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곳
애기봉은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위치한 해발 약 155m의 구릉이다. 높지 않은 언덕인 대신 자리가 예외적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을 정면으로 내려다본다. 직선거리 약 1.4㎞ 건너편이 북한 개풍군이다. 거리가 짧아도 그만큼 쉽게 닿을 수 없는 간극도 또렷하다. 흐르는 강, 건널 수 없는 물길, 이어져 있으나 멈춰 선 풍경이 이곳에 겹쳐 있다.
경계의 기억은 지명에도 남아 있다. 병자호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부녀가 아이를 안고 이 언덕에 이르렀지만, 더 이상 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확인된 사료는 아니다. 다만 이곳이 오래전부터 떠나야 했으나 떠날 수 없었던 장소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전쟁 이후 애기봉은 군사시설로 굳어졌다. 일반인의 접근은 제한됐고, 한때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으로 대북 심리전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관광지가 아닌 대치의 현장으로 시민의 발걸음보다 군인의 군화 소리가 익숙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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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올랐을 때 안개는 시야를 몇십 미터 앞에서 끊어냈다. 강도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북쪽은 물론 풍경 자체가 지워진 상태였다. 남아 있는 건 가까운 거리뿐이었다. 확인할 수 없는 간극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었다.
변화는 늦은 오후에 찾아왔다. 안개의 밀도가 느슨해졌다. 먼저 물길의 윤곽이 나타났다. 조강이었다. 이어 강 너머의 평야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잠시 뒤 건물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개풍군이었다. 선명하지는 않았다. 존재는 분명했다. 어둠 속을 오래 지나 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에 가까웠다. 출구에 닿지는 않았으나 방향은 보이기 시작했다.
전망대 한쪽으로 단체 관광객들이 차례로 난간 앞에 서자 조강과 강 너머 마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같은 풍경을 두고 언어는 달랐다. 한국전쟁 당시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눴던 이들의 후손이 관광객의 신분으로 이 언덕에 서 있었다. 이 장면만으로도 애기봉이 지나온 시간은 충분히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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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는 유리창이 넓게 열린 카페 공간으로 이어진다. 최근 문을 연 스타벅스 매장이다. 창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커피를 앞에 두고 조강을 바라본다. 주말이면 대기 줄이 생길 만큼 방문객이 몰리는 곳이다. 주문을 기다리는 풍경은 익숙하지만, 창밖의 배경은 낯설다. 일상과 경계가 같은 장면 안에 놓여 있다.
◇대결의 중심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2021년 정식 개방된 평화생태공원은 애기봉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군사시설이던 장소에 전망대와 전시관, 휴식 공간이 들어서면서 시민이 머무는 장소가 됐다. 이동하고 기다리고 다시 서게 만드는 동선은 이곳이 지나온 시간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전시관은 북녘의 땅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갈 수 없게 된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구성돼 있다. 입구에 놓인 ‘희망의 나무’에는 관람객들의 짧은 메시지가 매달려 있다. 거창한 구호는 드물다. 무사한 하루, 조용한 평화 같은 바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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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중심은 가상열차 체험이다. VR을 착용하면 ‘김포~애기봉~개성’이라는 방향 표지판이 눈앞에 들어온다. 김포 19㎞, 개성 23㎞. 이동은 가상으로만 가능하다. 열차가 개성으로 향하는 동안 지금의 멈춤은 더 또렷해진다. 고려의 수도 개성은 3차원(3D)으로 복원했다. 만월대와 개성 남대문, 선죽교가 차분하게 펼쳐진다. 개성은 정치적 공간이 아닌 역사 속 도시로 제시된다. 분단 이전의 시간을 복원하는 방식이다.
전시관을 나서면 다시 바깥 공기가 몸에 닿는다. 짧은 계단을 올라 전망대 방향으로 걷는 동안 시야는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안내 방송 소리가 옅어지고 발밑에선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전시관 안에서 머리로 이해했던 거리와 다시 몸으로 마주하는 경계 사이에는 분명한 온도 차가 있다.
밖으로 나오면 다시 전망대 방향의 풍경이 이어진다. 아래에선 철새가 날고 같은 방향으로 군사 경계선이 펼쳐진다. 한강 하구의 생태와 분단 지형이 한 공간에 겹쳐 있다. 애기봉이 특별한 이유다. 사람의 접근이 제한됐던 시간 동안 이 일대는 철새와 수생 생물이 안정적으로 머무는 공간이 됐다. 군사적 긴장이 역설적으로 자연을 지켜낸 셈이다. 자연은 흐르고 국경은 멈춰 선 상태. 이 희귀한 풍경은 애기봉을 단순한 전망대가 아닌 살아 있는 경계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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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 접근성만 놓고 보면 가벼운 당일치기 여행지다. 그러나 애기봉이 건네는 메시지는 그 거리보다 훨씬 깊다. 맑은 날보다 안개 낀 날이 이곳에 더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선명할 때보다 흐릿할 때, 애기봉의 본질은 더 또렷해진다.
해가 기울 무렵, 전망대 한편에서 들리던 해설은 잦아들었다. 관광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고, 난간 앞에는 잠시 빈 공간이 남았다. 안개는 다시 내려앉았다. 북녘은 또다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까지 이 경계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애기봉에서는 그렇게, 풍경보다 먼저 사람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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