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재한 항공·방산 전문기자] 유럽연합(EU)이 민·군용으로 모두 사용되는 ‘이중용도(dual-use)’ 기술에 대해 수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유럽산 부품과 장비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방산·항공 업계가 새로운 규제 환경에 놓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EU가 관리 대상으로 삼는 ‘이중용도’ 품목은 평소에는 공장과 연구소, 병원 등 민간 현장에서 사용되지만, 분쟁이나 전쟁 상황에서는 무기 개발이나 군사 장비로 전용될 수 있는 물자와 기술을 뜻한다.
EU는 이런 특성을 가진 첨단 기술이 제3국을 거쳐 군사력 강화에 활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이유로, 수출통제 범위를 계속 확대해 왔다.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미·중 기술 경쟁 심화가 겹치면서 민간 기술의 군사적 전용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EU는 지난해 이중용도 통제 품목 목록을 개정하면서 새로운 기술 항목을 대거 추가했다. 규제 대상에는 양자 컴퓨터 본체뿐 아니라, 양자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측정·분석 장비, 아주 미세한 신호를 읽기 위해 신호를 키워주는 장치, 영하 수백 도의 매우 낮은 온도에서도 작동하도록 만든 특수 전자부품 등이 포함됐다.
이들 장비는 주로 연구개발이나 산업 현장에서 쓰이지만, 암호 해독이나 정보 분석, 군사 시스템 고도화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중용도 품목으로 분류된다. EU는 해당 장비에 대해 수출 허가 심사를 강화하고, 최종 사용처와 재수출 가능성까지 함께 살피는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장비에 대한 규제도 한층 강화됐다. 미세한 회로를 새기는 노광장비와 회로 선폭을 측정하는 고정밀 검사 장비, 반도체 원판 위에 머리카락보다 훨씬 얇은 막을 한 겹씩 쌓아 회로를 만드는 증착 장비, 결함을 분석하는 고해상도 검사 장비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설비는 최신 스마트폰과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생산에 필수지만, 정밀유도무기와 군사용 레이더, 감시 장비에도 활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민간 공장에서 쓰이더라도 군사적 전용 가능성을 이유로 통제 대상에 포함되면서 이제 업체들은 공장 증설이나 장비 도입 단계부터 수출 규제 여부를 함께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항공·우주 분야에서도 민수와 군수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고온에서도 버틸 수 있는 특수 합금을 가공하는 장비나 항공기 엔진에 열차폐 코팅을 입히는 설비는, 엔진의 수명과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민간 여객기에서 먼저 쓰이지만, 동시에 전투기와 미사일 엔진의 성능을 높이는 데도 그대로 활용된다.
탄소섬유 복합재를 가공하는 설비와 위성 탑재 전자장비 시험 장비 역시, 기체를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거나 우주 환경에서 정상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데 쓰이는 공통 기술로, 상용 항공기와 통신 위성은 물론 군용 정찰위성에도 함께 사용된다.
EU는 이들 소재와 장비가 중간 거래를 거쳐 군사력 증강에 활용되지 않도록 수출 경로와 최종 사용자를 함께 관리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확대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국내 방산·항공산업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국내 항공·방산 업체 상당수는 사프란, 탈레스, CFM 인터내셔널 등 유럽 항공·방산 업체로부터 항공기 엔진 부품과 항공전자시스템, 복합재 관련 소재와 기술을 공급받아 완제품이나 부품을 생산한 뒤 수출하는 구조다.
완제기 수출뿐 아니라 MRO(유지·보수·정비) 사업에서도 유럽산 부품과 기술의 비중이 적지 않다. 향후 어떤 장비와 부품을 사용했는지, 최종 사용자가 누구인지, 제3국으로 다시 넘어갈 가능성은 없는지를 더욱 세밀하게 증명해야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이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연구용 고성능 컴퓨팅 장비나 반도체 제조 설비를 해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기존보다 까다로운 수출 허가 심사를 거치거나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미국과 EU 규제를 동시에 적용받는 품목의 경우, 계약 기간이 길어지고 행정 비용이 늘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업들은 기술 검토뿐 아니라 법무와 규제 대응 인력을 함께 투입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방산·항공 산업에서 수출 규제에 대한 대응 능력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과 가격만으로는 부족하고, 부품과 장비가 어디로 가고 어떻게 쓰이는지를 끝까지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보를 명분으로 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국내 업체들도 변화된 규제 환경을 전제로 수출 전략과 공급망 관리 방식을 다시 짜야 할 상황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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