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재한 항공·방산 전문기자] 글로벌 항공공급망 경쟁의 중심이 완성품에서 중간재로 이동하면서 미국과 유럽에 부품을 수출해 온 국내 항공산업이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항공기 제조 경쟁의 초점이 완성 기체 판매에서 엔진과 항공전자, 구조물 같은 핵심 중간재로 옮겨가면서 글로벌 공급망 안에 편입돼 온 국내 항공제조업계도 변화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항공기 공급망 불안은 구조적으로 취약한 글로벌 항공산업 생태계 위에 여러 변수가 겹치며 재편 속도가 빨라진 결과로 풀이된다. 팬데믹19 기간 축소됐던 항공기 생산과 부품 투자가 수요 회복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데다, 엔진과 항공전자처럼 대체가 어려운 핵심부품에서 병목 현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 취약성 위에 미국과 중국의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공급망 안정성과 통제 문제가 동시에 떠오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미 정부는 지난해 5월, 중국 국영 항공기 제작사 COMAC과 관련된 일부 항공기·부품 기술 판매를 제한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는 GE 에어로스페이스의 COMAC용 제트엔진 출하를 다시 허용했다. 짧은 기간에 제한과 허가가 반복되면서 항공기 엔진과 핵심부품 조달이 정책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항공기 부품이 외교·안보 갈등의 수단으로 언급된 사례도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제한과 관련해 보잉 항공기 부품에 대한 수출통제 가능성을 언급했다. 항공기 운항과 정비에 필수적인 부품이 정치적 갈등의 대응 카드로 거론되면서, 중간재 역시 지정학적 변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글로벌 항공기 제작사들은 공급망 불안을 이미 생산 실적으로 체감하고 있다. 에어버스는 지난해 12월 항공기 인도 목표를 기존 약 820대에서 약 790대로 낮췄다. 이후 지난 12일에는 크리스티안 셰러 에어버스 상업기 부문 대표가 A320neo 계열 엔진 공급 문제가 올해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 마디로 프랫 앤 휘트니 엔진 공급 차질이 완성기체 인도 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다.
보잉 역시 공급망 안정을 위해 공급망을 손질하고 있다. 보잉은 지난해 12월, 자사의 주요 구조물 공급사였던 스피릿 에어로시스템스를 아예 인수하면서 외주 중심으로 확장돼 온 기존 공급망 구조를 재정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항공기 생산과 품질, 공급망 관리를 직접 통제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공급망 재편은 항공기를 만드는 쪽뿐 아니라, 부품을 공급해 온 국가와 기업에도 새로운 시험대가 되고 있다. 글로벌 항공기 공급망 경쟁 중심이 완성 기체에서 중간재로 이동하면서, 중간재를 공급해 온 기존 협력사들 역시 공급망 재정립 과정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다. 국내 항공산업은 글로벌 항공기 공급망에서 기체 구조물과 엔진 부품 같은 중간재를 공급하며 성장해 왔다. 한국우주항공산업협회(KAIA)에 따르면 보잉과 에어버스 등 글로벌 원제작사(OEM)에 동체와 날개 구조물, 각종 기계·전자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중견 협력사가 국내에 다수 포진해 있다.
수출 실적도 이를 뒷받침한다. 관세청과 무역통계 등에 따르면 항공기 구성품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대미 항공기 부품 수출은 최근 연간 약 4억달러(약 5900억원) 규모로 집계된다. 한국이 미국 항공기 공급망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 온 중간재 공급국이라는 의미다.
국내 기업들의 참여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지난 2020년 12월, A350-900과 A350-1000 항공기의 날개 주요 뼈대를 공급하는 약 7176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2024년 9월에는 1조1268억원 규모의 보잉 737 날개 골격 구조물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지난해 6월에는 미 콜린스와 A350, A320neo 엔진낫셀 부품을 공급하는 1400억원 규모의 계약도 체결했다. 이 외에도 대한항공도 보잉 및 에어버스 상용기 프로그램에서 동체와 날개 구조물을 생산해 왔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역시 GE와 항공기 엔진 부품 공급 계약을 맺으며 글로벌 엔진 공급망에 참여하고 있다.
대신 업계에서는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이 완전히 배제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역할 축소나 지위 하락 가능성은 현실적인 변수로 보고 있다. 글로벌 항공기 제작사와 엔진사가 공급망 안정성을 이유로 거래처를 줄이고 핵심 협력사 중심으로 재편할 경우, 중간재를 공급해 온 기존 협력사들도 재검증 대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물량 축소나 프로그램 이탈이 발생하면 단기 실적뿐 아니라, 차세대 항공기·엔진 개발 참여 기회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러한 우려에 전문가들은 항공기 중간재 경쟁력은 정책보다 시장에서 먼저 검증된다고 지적한다. 국내 항공부품 기업들은 보잉과 에어버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오랜 기간 납품 실적과 품질 이력을 쌓아왔다. 공급망 경쟁이 중간재 중심으로 이동할수록, 이러한 실적이 공급망 내 위치와 수주 지속 여부를 가르는 핵심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결국 글로벌 항공기 공급망 경쟁이 격화되는 환경에서 국내 항공제조업계의 과제는 분명하다. 미국과 유럽 중심 공급망 안에서 단순히 대체할 수 있는 협력사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선택받는 핵심 공급사로 자리 잡을 수 있느냐가 향후 경쟁력을 좌우할 관건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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