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생산자물가가 넉 달 연속 상승하며 다시 한 번 물가 불안 신호를 보냈다. 반도체와 농축수산물을 중심으로 가격 오름세가 뚜렷해지면서, 이 흐름이 향후 소비자물가로 얼마나, 어떤 속도로 전이될지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사과·감귤 같은 장바구니 물가와 D램 등 핵심 산업 원자재 가격이 동시에 뛰었다는 점에서 체감 물가와 산업 전반에 미칠 파장이 작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2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21.76으로, 전월 대비 0.4% 상승했다. 지난해 9월 이후 4개월 연속 오름세다. 생산자물가는 기업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해 시장에 내놓을 때 받는 가격을 의미하는 지표로, 향후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로 자주 활용된다.
이번 상승을 이끈 가장 큰 요인은 농림수산품과 공산품,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전자·광학기기 가격이다. 농림수산품은 전월 대비 3.4%나 뛰었다. 농산물(5.8%), 수산물(2.3%) 모두 상승하면서 전반적인 식탁 물가 부담이 커질 가능성을 키웠다.
세부 품목을 보면 사과 가격은 한 달 만에 19.8% 급등했고, 감귤도 12.9% 올랐다. 닭고기(7.2%), 물오징어(6.1%) 등 주요 식재료 역시 상승 폭이 컸다. 기후 여건과 생산량 감소, 유통 비용 증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과일류는 이미 소비자물가에서 높은 상승률을 기록해온 품목인 만큼, 생산자 단계에서의 가격 급등은 체감 물가를 더욱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
공산품 중에서는 반도체를 포함한 컴퓨터·전자·광학기기 가격이 2.3% 오르며 전체 생산자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D램 가격은 15.1% 급등했고, 플래시메모리도 6.0% 상승했다. 글로벌 반도체 업황이 회복 국면에 접어들면서 수요가 빠르게 살아나고, 재고 조정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고성능 컴퓨팅 수요가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배경으로 꼽힌다.
1차 금속제품 가격도 1.1% 올랐다. 동 1차 정련품 가격은 9.9%나 뛰어 산업 전반의 원가 부담을 높였다. 반면 경유(-7.3%), 나프타(-3.8%) 등 일부 에너지·석유화학 관련 품목은 하락해 상승 폭을 일부 상쇄했다. 국제유가 하락 흐름이 반영된 결과다.
서비스 부문에서도 물가 상승 흐름은 이어졌다. 서비스업 생산자물가는 전월 대비 0.2% 상승했으며, 금융·보험(0.7%), 음식점·숙박(0.4%) 분야가 오름세를 주도했다. 이는 금리 환경과 인건비, 운영비 증가 등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수입품까지 포함해 가격 변동을 측정하는 국내 공급물가지수도 전월 대비 0.4% 상승했다. 원재료는 1.8%, 중간재는 0.4%, 최종재는 0.2% 각각 올랐다. 이는 국내 산업 전반에서 원가 부담이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국내 출하에 수출품까지 더한 총산출물가지수 역시 0.4% 상승하며 같은 흐름을 보였다.
시장에서는 생산자물가 상승이 곧바로 소비자물가로 이어질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생산자물가는 일반적으로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되지만, 그 속도와 강도는 기업의 가격 정책, 경쟁 상황, 정부의 물가 안정 대책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최근처럼 농축수산물과 반도체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품목이 동시에 오르는 경우, 물가 전이 양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농축수산물은 소비자 가격에 비교적 빠르게 반영되는 반면, 반도체와 같은 중간재 가격은 완제품 가격에 녹아들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생산자물가 상승은 단기적인 농산물 수급 요인과 중장기적인 산업 구조 변화가 동시에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과일·축산물 가격 급등은 기후와 계절 요인, 물류비 부담이 핵심이고, 반도체 가격 상승은 글로벌 기술 산업의 회복과 맞물린 구조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비용 상승이 기업의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경우 소비자 체감 물가 부담이 다시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정부가 공공요금과 일부 생활필수품 가격을 관리하고 있지만, 민간 부문에서의 원가 압력이 지속될 경우 방어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국제유가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물가에 긍정적인 변수로 꼽힌다. 에너지 가격이 안정되면 물류비와 생산비 전반에 완충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유와 나프타 가격 하락은 생산자물가 상승 폭을 일부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결국 향후 물가 흐름은 세 가지 요인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많다. 첫째, 농축수산물 가격이 설 이후에도 안정될 수 있을지, 둘째, 반도체 가격 상승세가 얼마나 지속될지, 셋째, 국제유가와 환율이 추가적인 비용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지 여부다.
생산자물가가 4개월 연속 상승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성'이다. 장바구니와 직결된 농산물, 국가 핵심 산업인 반도체, 그리고 서비스 물가가 동시에 오르고 있다는 점은 단순한 일시적 변동이 아니라 구조적인 물가 압력 가능성을 나타낸다.
당분간 물가 흐름은 완만한 긴장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들은 원가 부담과 소비 위축 사이에서 가격 인상 여부를 저울질할 것이고, 정부는 체감 물가 안정을 위한 관리 정책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Copyright ⓒ 폴리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